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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입문 Jan 29. 2022

냉장고 속에

#새해다짐

    물 마셔야겠다. 냉장고를 열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 멍청하게 서있는 물통 사이로, 문득 2주 전에 산 토마토 생각이 났다. 냉장고 아래- 야채칸 속 가장 깊숙이 박혀, 잊힌 그의 이름. 토마토. 새해에는 야채를 많이 먹겠다는 야심 찬 다짐과 함께 산 토마토였다. 춥다고 ‘내일로’ 귀찮다고 ‘내일로’ 오늘은 고기 먹고 싶다고 ‘내일로’ 기차도 아닌데  ‘내일로’. 지난주만 해도 멀쩡해 보여서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설날이 와 버리고 말았다. 의사의 심정으로 냉정해져 본다. 그는 이번 연휴를 넘길 수 없을 거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서 야채칸 아래로 내려간다. 묵직한 야채칸을 당겨, 비닐봉지를 아주 살짝 들어 올린다. 무슨 모습일지 두렵다. 역시나- 새카만 점이 무섭게 박혀있다. 쭈글쭈글 찌그러진 ‘최 상단’ 토마토를 발견했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최상단이 이 모양이라면, 미안하지만 아래쪽은 상상도 하기가 싫다. 지옥불 그 자체임에 분명하다. (너무나 두렵지만) 설 연휴 동안 그들을 방치했다간…  아, 그만. 비닐봉지를 벌컥 들어 올렸다. 101마리  점박이 강아지들과 다르지 않은 생 지옥이었다. 썩은 토마토라니, 나 같다. 새해 다짐은 2주 만에 무너져 점박이가 되었고, 이 썩은 토마토처럼 아무 쓸모없이 야채칸에 틀어 박혀있다 버려져야 한다. 썩어서 버려야 하는 토마토. 착잡한 심정으로 토마토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냥 버릴 수는 없도 없고… 잘라야 버리기라도 하지. 조각 조각낸 뒤에 뭉개버리려고 칼을 꺼냈다. 서걱! 괴물이라도 물리친 기분이 든다. 하수구 구멍 같은 까만 점 아래로 빨간 살이 보인다. 까만 점 아래 속도 엉망일 거라 생각했는데, 외외로 멀쩡했다. 그렇게 첫 번째 토마토를 정리하고 나니, 다른 토마토에게 작은 희망이 생겼다. 괜찮은 부분이 있나? 두 번째 토마토도 반 이상은 먹을 수 있는 상태였다. 세 번째는 꼭지만 이상했다.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썩었지만 살아 있었다.

 

    그렇게 모으다 보니 꽤 된다.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되나? 그냥 버릴 수도 없고…. 어두컴컴한 기억 한 구석, 싱크대 아래 잠든 도깨비가 떠올랐다. 쓸 거라는 환상으로 일단 사놨지만, 부엌 가장 어두운 싱크대 아래 잊혔다. 방치된 도깨비방망이는 마법의 방망이다. 콘센트에 꽂기만 하면 프랑켄슈타인처럼 죽은 토마토도 살려낸다. 썩은 토마토를 때려 주스로.


    하나의 선택이 남았다. 설탕,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 세상 사람들에게 설탕은 악마의 자식이다. 이도 썩게 만들며, 살도 찐다. 모두가 ‘무가당’을 외친다. 그 냉엄한 사실에도 불과하고 나는 섣불리 설탕통을 닫지 못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그냥 토마토 주스 너는 맛이 없다. 쌉싸름한데, 시기도 하고 그저 맛이 없다. 이대로는 토마토 주스를 끝장 낼 자신이 없다. 세상의 중심에서 ‘가당’을 외쳤다. 나는 가당! 가당! 가당!이다. 먹자, 먹고 나가자. 나가서 운동을 하자. 그리고 힘차게 도깨비방망이를 돌렸다.


    꿀꺽꿀꺽. 역시 가당이다. 토마토 주스를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썩어서 버린 부분 사용한 부분의 1/5도 되지 않았다. 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모든 토마토가 썩어있었지만, 단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쓸모없는- 잊힌 도깨비방망이와, 악마의 자식 설탕, 버려야 하는 썩은 토마토는 그렇게 쓸모를 찾았다. 마지막 단 하나 멀쩡한 토마토가 보였다. 만져보니 실상 얘도 말라서 핼쑥했다. 결국 냉장고 안에 멀쩡한 토마토는 하나도 없었다. 세상엔 사실 완전하게 멀쩡한 건 없는 게 아닐까? 자신은 멀쩡하다고 착각하는 토마토도 갈아버렸다. 다시 냉장고를 열었다. 주황색 불 아래 멍하게 서 있는 물통 옆에 남은 주스를 넣었다. 야채를 먹었고,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새로 산 야구화를 신고 걷기로 했다. 소소하지만, 새해 목표를 이룬 꽤 쓸모 있는 하루였다.


새로 산 운동화, 가성비가 좋다



꽤 많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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