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입문기 #4
로드 자전거, 로드 바이크, 하여간 로드.
살려면 제대로 사야 한다는 소리에 이것저것 찾아보는데 그놈의 '제대로' 살려면 차 값이랑 비슷하다고 한다. 다 좋은데 자전거 차체가 아무리 좋아 봐야 뭐 하나, 엔진이 내 다리일 텐데. 이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런 느낌이다. 뭐랄까 페라리에 내 다리가 애매하게 붙어있는 그런... 꽤나 무서운 그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다.
살까 말까 고민했더니, 친구가 “그럼 빌려줄까?”하고 선뜻 말을 꺼낸다. 로드는 비싼 만큼 기어가 복잡하고, 다루기도 어려워서 초보에게 빌려줬다가는 고장 나기가 쉽다. 당연히 빌리기도 빌려주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뭐, 내 인복인가 보다. 짧은 감동은 뒤로 하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주에 자전거를 가지러 냉큼 달려갔다. 신이 나서 타고 바로 한강을 달려보겠노라 외쳤는데, 일단 친구가 손을 휘휘 젓는다. 일단 한 번 시승을 해보라고 했다. (차도 아니고)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서 그래보기로 했다.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모닥모닥 어른들이 모여 자전거를 연습한다.
로드를 살짝 들었는데 가볍다. 한 손으로 들린다. 커다란 외관에 비해 가벼운 몸! (사물이지만 매우 부럽다.) 안장에 앉으려 했는데, 상당히 높아서 앉기가 매우 난해하다. (한 마디로 매우 아프다.) 앉을 수 없으니 출발도 할 수 없다. 안장에 앉은 채 자전거를 90도로 세우려고 하면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자전거는 90도로 서있을 필요도, 앉아서 출발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엔 '그래야 한다'는 믿음으로 만들어진 게 꽤나 많지 않은가 싶다. 고정관념이자, 어쩌면 강박이었다.
'안장이 높으니, 앉아서 출발할 수가 없다.'라는 문장은
'안장이 높으니 앉지 말고 출발하면 된다.'로 바꿀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려도, 의외로 쉽다. 안장이 높아서 90도로 자전거를 세우면 다리가 닿지 않기 때문에 출발할 수 없다. 하지만 안장이 높으니 앉기를 포기하고 살짝 자전거 앞 쪽에 다리를 놔두면 못할 것도 없다. 막상 안장 앞에 서 있으니 오히려 앉아있을 때보다 편하다. 로드 자전거를 두고 서있는 걸 배웠으니 이제 앞으로 가야 한다. 앉은 채로 페달을 밟으면 -세발자전거 때 배운 방법- 자전거는 앞으로 간다. 하지만 이 로드 자전거는 다르다. 왼쪽 발을 페달에 올린 채로, 오른발로 땅을 차면서 앞으로 나간다. 그 동력으로 균형을 잡으면서 자전거가 앞으로 간다. 스케이트에 두 발을 올릴 때랑 비슷하다. 내가 보드를 탈 땐 오른발을 앞에 두고 왼발로 땅을 찬다. 어느 정도 속도가 난 다 싶을 때 축이 되는 오른발 뒤로 슬쩍 왼발을 같이 올린다.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이 버릇이 들아서 뭘 타든 이게 편하다. 보통 오른손 잡이면 왼발이 축발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데, 하여간 이런 사람이 적다. 그래서 이 오른발잡이들을 멍청이(goofy)라고 한다. 하여간 멍청이 스타일을 자전거에도 적용해서 자전거를 세우지 않고, 계단에 오르듯, 스케이트보드를 타듯 출발한다. 드디어 안장에 앉았다. 결국 안장이 높으니 앉지 말고 출발했고,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앞으론 가겠는데 으악-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 얼른 브레이크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웬걸 자전거가 중심을 못 잡고 휘청였다. 브레이크가 생각보다 훨씬 더 세게 콱 들어간다. 이놈의 브레이크가! 놀랄 새도 없이 멈춘다. 세게 멈춰서 결국 넘어질 뻔했다. 주차장 끝까지 다다라서 이제 핸들을 꺾어야 하는데, 뭐 얼마 힘준 것도 아닌데 갑자기 180도로 꺾인다. 익숙해지나 했더니 어느샌가 너무 신이 났다. 와당탕 넘어가나 했는데 이번엔 자전거 빌려준 친구가 부축을 해서 겨우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페달을 밟으면 훅 나가고, 핸들을 꺾으면 확 꺾이니 어이구, 이건 자전거가 아니라 스포츠 카다. 페달을 밟으면 그냥 일반 자전거 5번 갈 거리를 한 번에 훅 가는 느낌이 든다. 이제야 주차장 코스를 제법 익숙해졌다. 몇 바퀴 빙글빙글 돌만큼 익숙해진 다음 거리로 나가보기로 했다.
이게 또 전혀 다른 세계였다.
로드는 충격을 감소시켜 주는 차체 장치가 없다. 최대한 가벼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퀴도 얇다. 로드가 겁이 없어서 도로로 달리나 했는데, 오히려 겁이 많아서 도로로 달릴 수밖에 없다. 충격에 약하니 이대로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것도 문제일 것이고, 이렇게 얇은 바퀴로 이 나라의 들쑥날쑥한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를 달릴 수도 없다. 보도블록 사이에 바퀴가 껴서 넘어질게 뻔하다. 친구집 아파트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을 향해가는 길이 가장 어렵고 무서웠다. 도로 끝의 흰색선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게 처음 하는 입장에선 겁도 나고 무섭기도 했다. 굳이 말하자면 동네길은 중학교 때 산 MTB를 타고 다니는 게 훨씬 편하다. 보도블록에 낄 일이 없으니 살살 사람들 피해 가며 인도 위를 달리면 되고 (일단, 자전거도 차이니 몹시 주의해야겠지만) 오르락내리락하더라도 충격방지도 되어있으니 아플 것도 없다.
자전거 전용도로로 나오자 그곳은 또 다른 세계였다.
마치 고속도로를 탄 것처럼 한번 페달을 밟을 때마다 순식 간에 나아간다. 축지법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한참 빠르다. 뒤에서 누군가 밀어주듯 빠르게 앞으로 나아간다. 부닥칠 것 없는 깔끔한 도로, 자전거 도로에 사람도 적당하게 한적했다. 그렇게 1시간 여를 달리자 어느새 동네에 다다랐다. 1시간 동안 동네 밖을 나온다고 버르적거리고, 거의 그 10배에 달하는 거리를 1시간 만에 주파했다. 내가 벌써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일단 로드가 주는 속도감이 또 다른 재미를 주었다.
그날 이후 로드를 꽤 한참 동안 탔다. 출퇴근도 해 보았고, 장거리를 타기도 했다. 하지만 문득 깨달았다. 나는 속도감이 주는 재미보다, 으스대며 비싼 차를 자랑하는 재미 보다 다른 재미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런 마음의 정리가 되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막상 정리하고 났더니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내가 사야 할 다음 자전거는 로드는 아니라는 것과, 어떻게 해야 할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