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속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 2016. 12. 24
한국에 돌아온 후 몸을 돌보기 위해 한의원에 들어 몸의 체질을 가늠해 보니 소양인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몸을 위한 조언들 중 먹을 것에 대한 것이 있었는데, 그중 고기를 잘 챙겨 먹으라는 것이 있었다. 특히 그중에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말이 귀에 틀어 박힌 듯이 한의원을 나온 뒤에도 이명같이 맴돌았다.
그렇다고 돼지고기 구이를 매일 먹을 수는 없고 일상적으로 먹기에 좋은 걸 생각하다가 우연히 지나다 본 순대국밥도 돼지고기가 있으려니 하는 생각에 먹기 시작한 것이 7군데 이상의 식당을 전전하며 순대국밥을 먹고 관찰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나름 몇 가지 이것의 특성을 발견하였다.
첫째, 순대국밥이라고 하지만 정작 순대는 몇 개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순대국밥이다. 가장 많이 넣어주는 곳이 4개였다. 그럼 나머지는 뭐냐?. 보통 분식점에서 순대를 시키면 동그란 순대가 쌓인 그룻의 구석에 걸처놓듯이 두는 잡고기들, 남겨도 별로 미안하지 않고 때론 주문할 때 '순대만 주세요'라고 차별해도 되는 돼지의 잡고기들이 순대국밥의 주 건더기가 된다. 나도 분식점에서는 비려서 잘 못 먹는 그것들이 뜨끈한 그 국물 속에서 어우러 지면 잘근잘근 씹어가며 먹게 만드는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둘째, 맛나게 잘하는 순대국밥집은 절대 다진 양념을 먼저 넣어서 내놓지 않는다. 별도의 종지에 새우젓갈과 함께 내놓아 식객이 자기 입맛에 맞게 넣어서 먹을 수 있게 한다. 다진 양념을 먼저 넣는 곳은 그 양념 맛으로 원 국물의 '맹탕'을 감추기 위한 꼼수다. 국물이 진국인 순대국밥집은 절대 다진 양념을 먼저 섞지 않는다.
셋째로, 순대국인가, 순대국밥인가? 난 외식업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공식 명칭이 뭔지 모르지만 이 두 가지 이름이 주는 의미는 나에게 사뭇 다르다.
'국'이라 함은 식탁에서 밥의 오른팔 역할을 할지는 몰라도 어찌 되었건 한 끼 밥의 보조적인 국이라는 또 하나의 반찬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국밥'은 그 자체가 밥이며 또한 훌륭한 메인 요리다. 그런데 순대국밥을 먹는 사람들을 보면 밥을 따로 먹으면서 순대국 속의 고기를 '따로' 덜어내 가며 먹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내가 보기엔 순대국밥의 '국밥화'된 맛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 부글거리는 뚝배기를 받고 밥을 바로 말아 넣고 들개 가루를 넣어 휘젓고 적절히 다진 양념으로 간을 맞추고 나면 끝이 아니다. 그 뜨거운 국물 속에서 밥이 불어나고 고기가 육수를 머금고 고기도 국물에 녹아들면서 새로운 맛이 나온다. 나중에 가면 질퍽해지기 까지 한다. 그것이 국밥화 된 순대국밥의 진정한 맛이며 그렇기에 난 이름을 '순대국밥'이라 부르고 싶다.
그런데 그냥 밥 한 끼를 위한 순대국밥 먹는데 뭣 때문에 식재료의 구성비, 서빙 방법과 호칭까지 따지는가 생각해 보면, 그것은 모두 혼자서 순대국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같이 먹는 사람을 앞두고서 4차원적으로 뚝배기 속을 휘적 뒤적거리면서 순대 개수를 헤아리고 고기가 얼마나 들었는지 마치 시어머니가 며느리 부엌 찬장 들여다보듯 들추어 보고 식당 운영 방식까지 암행 감사하듯이 쳐다보겠는가?
혼밥을 해보니 생각보다 혼밥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발견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해보니 혼밥꾼들에게 나름의 불문율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것은 특히 점심시간에는 식당의 피크타임을 피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2시 40에서 50분 정도에 슬그머니 들어가서 2인용 테이블이나 구석자리에 가주는 것이 예의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러한 혼밥꾼들의 인간미를 무용지물로 만들기도 한다.
우연히 혼밥을 위한 테이블을 갖춘 곳에 가본 적이 있다. 나름 밥때에 손님도 많고 잘 팔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자리들을 주로 벽이나 창문을 바라보는 일렬식 테이블이라는 것이다. 혼자 먹는 것도 꿀꿀한데 벽보고, 창밖이나 보고 먹으라는 거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친구 얼굴 삼고 밥 먹게 된다. 그곳에 다시는 가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 혼밥꾼들에 대한 홀대 때문만이 아니라 다진 양념을 섞어내 내놓는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다지 관계지향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혼자 밥 먹는 것은 정말 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먹거리와 먹는 삶은 모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입에 들어온 것은 엄마의 살아있는 몸에서 바로 넣어주는 젖이었다. 그 후에 처음 먹은 밥도 엄마가 입으로 씹어서 넣어준 이유식이었고 그 쌀은 아버지의 농사일로 거둔 것이다. 이미 중년의 몸이지만 내 골수 깊은 어딘가에는 아직도 어릴 적 어머니의 젖 내음으로 만들어진 유기체가 남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혼밥의 쓸쓸함을 만회해주는 시간이 있다. 그것은 실직자이기에 거의 매일 누릴 수 있는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상이다. 그 저녁상에는 고향 경주의 부모님이 보내주신 쌀로 지은 밥과 처가댁 목포에서 올라온 김치와 반찬들, 아이들이 준비하는 밥상 준비, 아내의 손맛이 담긴 국- 그 속에는 일 못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격려와 안타까움의 양념을 때로는 짜증이라는 MSG를 치기도 한- 그리고 밥은 정말 깨작거리는데 식사기도만큼은 새벽기도 같이 하는 딸의 기도, 말할 틈도 없이 맛있게 먹어치우는 아들의 먹성...
이 식탁은 시간과 공간과 세대가 함께 초월적으로 어우러진, 어찌 보면 거룩한 성전과 같은 의미가 나에게 있다. 그런 저녁상이 있기에 잠시 지나가는 점심 혼밥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먹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것은 예수가 우리의 구원, 죄의 문제보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먼저 챙겼기 때문이다. 못 먹어서 당분 없는 멍한 머리에 대고 구원을 외쳐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우리 몸을 지은 그 창조주는 누구보다 잘 안다. 오히려 먹고 먹이는 그 자체가 현실적인 구원이지 않은가? 삶에 희망을 가지는 사람은 먹고, 누군가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사람은 그 누군가를 먹인다.
나에게 신앙 공동체라는 곳은 이런 곳이다.
예수의 결코 식지 않는
아니 여전히 뜨겁게 부글거리는 진한 그 피 국물 뚝배기 국물 속에
나와 그리고 함께 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잡고기로 여기고
각자의 인생이 우러난 맛을 알고 이해해주는 이름을 서로 불러줌으로
그 속에 함께 어우러진 먹거리가 되어
혼밥 인생을 살아가야 되는 사람의 영혼을 먹이고 살리는
그런 곳이고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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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마지막 절차인 형식적인 인사부서의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 길, 별다른 사항이 없어 다음 주엔 출근하겠구나 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면접 본 안국역에서 종로 3가까지 가는 길. 이미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 길에서 낙원상가에 이르니 종로3가역 뒤편의 구 시가지 골목 입구가 보인다.
여기엔 아마 숨은 맛집들이 있다지... 하는 생각에 골목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갔다 이리저리 미로같이 헤매다가 구석 코너 자리에 허름한 순대국밥집을 보았다. 혹시 여기는..? 하는 생각에 들어가 보니, 열리는 문은 코팅이 안된 오래된 알루미늄 새시, 벽은 목재패널로 마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목재... 80년대에 지어진 듯한 전형적인 강북 구시가지의 오래된 식당에 빈 테이블 하나 없이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자리를 매우고 있었다.
자리를 찾을 수 없어 황망히 서 있으니 서빙하는 지긋한 연배의 아저씨가 여기에 앉으세요 라고 자리를 가리키는데 거긴 반대편에 열심히 식사 중인 한 분이 계셨는데,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중간쯤 놓여 있던 깍두기 그릇을 자기 쪽으로 옮겨준다. 혼자 왔는데 혼자 먹지 않는 점심 식사가 되었다.
순대국밥이 나왔다. 잡고기 건더기는 식감이 중요하다 그것은 고기 자체도 중요하지만 두께가 영향을 준다. '아.. 이곳은 정말 식감 같은 얄팍한 거 신경 안 쓰는구나' 고기가 다른데 비해 두배는 두꺼웠다. 나중에 밥을 말아 넣고 보니 밥반 고기반이다. 물론 다진 양념도 따로 넣는다.
혼자 먹지도 않고 다른데 보다 1천 원이 싼 가격에 더 푸짐하게 먹은 것은, 그곳의 허름함 때문일 것이다. 그 허름함이 나와 내 앞에 있던 분도 '같이 한 끼 잘 먹고 갑시다'라는 무언의 공감이 이루어지게 한다. 그 허름함이 비싼 가게 임대료 대신 넉넉함의 식사를 가능하게 한다.
허름한, 그렇기에 더더욱 넉넉함이 있는
그런 공동체...
새 직장의 연봉이 전 직장의 반도 안되지만, 오히려 더 넉넉히 살 수 있고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보기 위해 종로 3가 가장 깊은 5호선 지하철로 내려가는 내내 뱃속이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