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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만저만 Apr 28. 2024

작은 일상

연필

  책상 모니터 뒤, 잘 보이지 않는 곳. 둥근 펜꽂이에 쓰지 않는 볼펜과 함께 연필이 몇 자루 꽂혀 있다. 회사 행사에서 고객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제작된 연필이다. 처음엔 끝이 뾰족했지만 지금은 끝이 뭉툭해졌다. 한 자루 꺼내 손에 쥐어 본다. 연필의 길이는 처음과 같지만, 다시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야 사용할 수 있는 연필이다. 오랜만에 쥐어 보니 가볍고 나무의 느낌이 좋다. 연습장에 지렁이 몇 마리를 그려본다. 종이에 볼펜심의 볼이 굴러가는 볼펜과 달리 연필심이 종이와 마찰을 일으키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 쓰으윽 쓰으윽. 좋다.


  얼마 전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집 앞 ‘다있는’ 상점에서 예쁜 편지지를 골랐다. 크기가 제멋대로인 편지지에 컴퓨터 문서편집기를 이용해 작성한 글을 출력할 수 없었다. 볼펜으로 틀리지 않게 집중해서 쓰다 보니, 이미 작성한 내용이지만 옮겨 쓰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 다 쓰고 나니 손가락과 전완근이 얼얼해 힘들었다. 이래서 사랑을 쓰려면 연필로 써야 하는가 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손으로 글을 쓸 일이 거의 없다. 손은 글을 쓰는 용도에서 조금씩 퇴화되고,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는 쓰임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 점점 빨라지는 타이핑 속도때문에 글의 내용인 생각이 설익는 게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얼마 전. 큰아이는 학원에 갔고, 작은아이는 안방에서 핸드폰을 보고 아내는 강아지와 산책을 나간 어느 토요일 오후. 텔레비전이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채널을 돌리다 폭탄이 터지고, 총소리가 나는 채널에 조건반사와 같은 반응으로 이리저리 돌리던 채널을 멈췄다. 백악관을 장악한 악당으로부터 미국대통령과 자신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초인적인 액션을 구사하는 영화를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었다. 악당이 평화주의자인 대통령에게 말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틀렸어. 핵무기 발사 코드를 어서 내놔!’ 결국 악당의 뜻대로 핵무기 발사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발사버튼만 누르면 된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는 대통령을 희생해서라도 핵무기 발사를 막으려 최신 전투기로 백악관 폭격을 감행한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주인공은 핵무기 발사를 중지시킨다. 전투기는 이 상황을 모르고 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주인공은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 남고, 딸에게 멀리 대피하라고 한다. 하지만 딸은 다가오는 전투기를 향해 대형 깃발을 흔들며 아빠와 대통령의 목숨을 구한다. 이 장면에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호르몬 분비의 변화 때문인가. 요즘 눈물이 많다. 아이가 아빠와 대통령을 구해서인가. 아마도 펜이 칼보다 강한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감동한 것 같다.


  하루는 거실 화장실 하얀 욕조에 가늘게 돌돌 말린 검은 물체들이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이지? 나도 매일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고 때를 밀지 않는다. 혹시 민다면 저렇게 나올까? 아이들이 평소 나처럼 건성으로 샤워를 하다가 엄마에게 잡혀 등에서 밀려 나온 때인가? 나는 욕실에서 나와 주방에 있던 아내에게 "욕실에 있는 저 때 같은 건 뭐야"라고 물었다. "뭐? 때가 왜 있어?"하며 건성으로 대답하고 하던 일을 한다. "아니 욕조 안에 때가 잔뜩 있던데". 그제서야 하던 일을 멈추고 "'아! 그거! 그거 지우개 똥이야".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아이가 가끔 식탁에서 연필로 숙제를 한다.


  'Simple is best'라는 문구가 있다. 우주에는 중력과 대기압이 거의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볼펜을 쓸 수 없다고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질소를 이용하여 잉크를 눌러 가압하는 형식의 펜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의외로 간단한 방법도 있다. 펜 대신 연필을 쓰면 된다. 가끔은 복잡한 것보다 단순하고 소소한 것들이 더 좋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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