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주희 Oct 04. 2021

아빠는 로드매니저

담아두기만 하면 똥 일 뿐인 귀하고 값진 것.

마치 VIP 경호원 같았다. 묵묵히 운전해주시고 웨딩 촬영 중에도 스튜디오 한편 구석진 곳에 앉아 계셨다.

딱히 신부를 지켜보려고 그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신부가 싸 온 김밥을 구석진 자리에서 드시다가 신랑 구두를 차에 두고 왔다고 하자 두 번 묻지도 않고 차키를 들고나가셨다. 아버님께선 그렇게 그림자처럼 생색 한마디 없이, 항상 돌아보면 뒤에 계셨다.


     

신부는 다정한 신랑과 그림자처럼 계셔주시는 아빠와 함께 마냥 웃으며 해맑은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딱히 대화를 나눈 것도 없는데 그 아버님은 나를 종일 울컥한 기분에 빠지게 했다.

엄마도 아니고 아빠가 딸의 편안만을 위해 웨딩 촬영하는 날, 운전(만)해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고.     

   

아버지라는 존재는 참 어렵다. 

보통의 아빠들은 잘 소통하지도 않고 에고가 확고해서 대하기 여간 까다롭지 않다. 각자의 다른 의견을 느슨하게 지켜보는 여유가 없다. 그래서 자라면서 아빠와 의견이 부딪히면 중간 합일점이 없었다. 내 또래의 많은 딸들이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자라면서 아빠는 어쩌다 한번 보이는 바쁜 사람이었다. 애기 때는 무서웠다.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일도 자주 있었다.

초등학생 때 아빠게 내게 먹기를 강요했던 음식은 심지어 해삼이었다.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 해삼이 되었지만 그날의 기억이 얼마나 강한지

해삼을 먹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그날이 스친다.

혼나거나 야단맞은 기억들이 주로 있는데

아빠가 나를 위해 ‘몸을 움직여서’ 뭔가를 해 줬다는 기억은 거의 없다.

        



몇 년이 지나 그 신부의 여동생이 결혼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동생분의 결혼식을 도우면서 웨딩 촬영하는 날 그 아버님을 다시 뵙게 되었다. 이번에도 딱 그렇게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별말씀 없이

잘 나가는 연예인 로드매니저라도 되듯이 그야말로 묵묵하게 사위도 불편함을 못 느끼도록

대기하고 운전해주셨다.   

   

그들의 결혼식 날, 몇 년 전 내 신부였고 지금 신부의 언니, 이렇게 홀리한 아버님의 장녀인 그녀에게 아버님에대한 부러움을 토로했다. 그녀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어릴 때는 아빠가 무섭기만 했어요. 엄격하고 사소한 대화 같은 건 아예 없었어요’  

        

세상에나 저 아버님이 우리 아빠 같았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한다고 하고 얼마 후 아빠가 술 한잔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더니    

       

뭘 잘 모르고 아빠가 돼버리고, 사는 게 바빴다.

어떻게 아빠를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하는 중에 딸이 다 커버리더라, 그러는 사이 당신 자신은 늙었고.

그런 딸에게 되어 주고 싶은 아빠의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는데

이제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난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이지 청천벽력이었다고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한다.       

    

“어릴 땐 아빠가 미울 때도 있었어”

“아빠도 어떻게 아빠를 해야 하는지 몰랐어. 미안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랜 앙금을 털어내는 대화를 나누면서 딸의 내면의 어린아이가 치유받고

아빠의 내면의 신입아빠 죄책감도 어느 정도 해소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는 지금처럼 이렇게 로드매니저 같은 아빠가 되셨다는 거다.

모두 함께 웨딩홀로 향하고 있었고 난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얘기를 들었던 순간,

그 결혼식 아침의 잠실 도로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그 아빠였다면 60년 이상 살아낸 후에 후회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금방 잘한 일들을 꺼내어

예컨대 난 성실했어, 집안을 휘청이지 않게 잘 일궜어, 아이 때문에 포기했던 게 얼만데

뭐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정도로 생각하고 후회와 회한의 감정을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을 것 같다. 그럼 각자의 마음속 치유 받지 못하고 방치된

과거의 상처 받은 ‘어린 우리’들이 서로를 또 스스로를 자꾸 오해하고 미워하게 했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라면서 회피했을 것이다.

        

아버님은 어떻게 용기를 내셨을까? 그런 용기는 어쩌면 가까운 가족일수록 더 어려운 건데 말이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멋지고 그런데 나는 막상 본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버님처럼 멋지게 시작하면 되는 건데, 풀면 풀리는 매듭이라는 것을 확인하니까

알면서도 시작하지 않고 외면하는 못난 내가 한심했다.   

    

가족 간의 갈등을 생각할 때 내가 잘못한 거 한 움큼을 자각하다가 반드시 튀어나오는 건

상대에 대한 질책이다. 내가 잘한 것은 없지만 당신이 먼저 이랬기 때문에 내가 이럴 수밖에 없다.

이런 패턴이다. 자신이 못난 걸 인정하기 싫으면 싫을수록 상대의 잘못을 일부러 더 부풀린다.

그 아버님이라고 딸들에 대한 원망이 없었을까? 아이라고 딸이라고 해서 모든 부분 다 선하다고 이해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딸들도 못되게 굴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빠의 의도를 오해하고 엇나가게 행동했을 것이다. 딸들이 이 정도로 굴었다면 아빠가 그럴 만도 하지... 하는 그런 날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데 아버님은 손을 내밀어주셨다. 내가 잘 몰랐다, 미안했다, 네가 시집을 간다니

이제야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하시고는 행동으로 실천하셨다. 평생 기억하고 싶은 멋짐이다.

그런데 마음속 그 뜨거운 사랑, 자식을 향한 애정의 ‘크기’만을 측정한다고 했을 때

사과하고 행동을 하는 아빠가 (물론 멋지긴 하지만) 애정의 크기까지 훨씬 클까? 그건 아닐 수도 있다.

마음속 깊숙이 있는 사랑의 가로 세로 둘레를 측정해볼 수 있다면 크기는 비슷할지 모르겠다.

애정은 더 크지만 더 후회할 행동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도 내 속 안에만 담아두면 똥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다.



내 마음속 귀한 걸 똥으로 만들지 말고 당장 끄집어낸다면 불편한 속이 확 편해지고 

새로운 사랑을 포식할 수 있을 것이다.  

   

거창하게 사과하는 자리는 오글거리고 손꼬락 없어질 것 같다면 그냥 운전을 한번 해주는 정도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아빠 오후에 병원 가신다고 하면 과감히 반차를 탁! 내고 병원에 한 번 모시고 가는 거, 별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꼬리곰탕이라도 함께 먹는  걸로 시작할 수 있다. 내가 한턱 쏘지 않고 얻어먹기만 해도 함께 하는 것만으로 사랑이 번지는 유일한 관계가 가족이니까.

엄마, 아빠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 아버님처럼 내가 조금씩 몸을 움직여 실행을 하면

아마 3년 뒤, 5년 뒤 10년 뒤는 다르지 않을까?    

  

아무튼 이런 퍽퍽한 세상에 따뜻한 내 편이 되어 주는 가족과 친구, 내 사람들이 중허지 뭐가 중허단 말인가. 숨 쉬고 살아있기만 해도 든든하고 좋은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니까. 

우리 모두 기적을 똥으로 만들지 않길 아니, 나는 그러지 않길 바라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