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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17. 2023

편의점 회고록#2

손님한테 맞은 이야기(2)

취객 아저씨는 다른 손님들 틈에 섞여 괜스레 가게 안을 배회하며 쭈뼛대고 있더라. 그렇게 가게 안의 모든 손님들이 계산을 끝내고 나가자 내게 다가왔어.


"그... 합의 좀 해줘."


충격적 이게도 그가 내민 첫마디는 사과가 아니었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는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서 내게 한 첫 말이 합의라니...


당연하게도 난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완전한 무시. 아저씨를 이곳에 없는 사람 취급했지. 그렇게 두어 명의 손님들이 더 왔다 가고, 아저씨는 한참을 서성이다 '내일 올게'라는 말만 남기고 가버렸어.


다음 날 같은 시간에 다시 찾아온 아저씨는 늘 피우던 담배를 두 갑 사고서 또 한참을 고민하는 것 같더니 결국엔 사과를 하더라.


"미안했다. 내가 그날 술이 취해서..."


술... 그래 술이 문제긴 했지.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변명이 고작 술 하나라고 한다면, 역시 그날도 내가 아저씨에게 할 말은 없었어. 당시에 내가 속으로 정해 둔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기 위한 선행 조건은, 적어도 자신의 잘못을 완벽히 인지하고 그 잘못에 대한 사과였거든. 뭐, 사실 그 만한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니까. 지난날의 잘못을 돌아보고 반성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망하게 두진 않을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취객 아저씨의 방문이 이어진 지 일주일째. 또다시 경찰에게 연락이 왔어. 합의해 줄 생각이 있느냐고. 난 합의 의사가 없음을 전달했어. 그러자 경찰이 혹시 이유가 있냐고 물어보더라. 보통 폭행사건은 전과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전과자들은 그냥 몇 개월 형을 산다고 하면서) 금액만 조율이 되면 합의가 되는데, 물론 경찰 본인이 개인적인 견해를 가지고 간섭할 일은 아니라고 설명을 덧붙이면서도 의아해하더라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합의를 합니까?"


다짜고짜 찾아와서 내민 첫마디가 사과 한마디 없는 '합의'였으며 이후에 찾아와서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와 자신의 잘못을 그저 술 탓으로 돌리는 사람과는 나눌 대화가 없음을 경찰에게 알렸어. 그리고 경찰과 통화를 한 다음 날 취객 아저씨가 가게에 찾아와서는, 내가 경찰에게 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무릎을 꿇고서 다시 사과를 하더라.


술을 마신 그날 사기를 당해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는 쓸데없는 변명을 곁들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폭력은 안 되는 것이었다며, 자기가 이번에 깨달은 바가 크고 절대로 다른 곳에 가서도 실내 금연을 지키고 주먹을 휘두르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더라. 무엇보다 술을 멀리하겠다고.


"아저씨 일어나세요."


나는 알고 있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그랬고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다른 중년 남성 손님들도 그랬지. 자존심이 강하며 말 수가 적고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무엇보다 가부장적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자식벌 되는 청년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네가 용서를 해 주고 안 해주고를 떠나서 이번 사건으로 많이 깨달았다. 그러니 다만 사과라도 받아줬으면 좋겠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그래서 이 아저씨의 사과가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나는 용서하기로 했어.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진심 어린 올바른 사과를 하는 것이 저 취객 아저씨와 대화를 하기로 한 조건이었는데, 사실 그건 대화의 조건임과 동시에 용서의 조건이기도 했거든. 뭐, 조금 늦긴 했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합의서는 가져오셨냐는 내 말에 아저씨는 뒷주머니에서 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쓱 내밀더라. 속마음은 딱 이랬지.


'뭐야, 이미 준비돼 있었어?'


조금 얄밉긴 했는데, 뭐... 급했겠지. 나라도 급했을 거야. 그런데 웃긴 건 합의서에 삐뚤빼뚤 손글씨로 두어 줄 적혀 있더라. 누구누구는 누구누구가 실내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폭행한 것을 용서한다. 뭐 이렇게 적혀있었던 것 같아. 내가 합의서를 작성해보진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나 미디어를 통해 들은 것과는 상당히 다른 순진한 합의서(?)에 웃음이 나더라고.


"아저씨. 합의서요, 경찰서에 찾아가서 양식 하나 얻어오세요. 이거 가지고 안될 거예요."


아저씨가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보길래 폰으로 폭행사건 합의서 양식을 보고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거나 뭐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알려줬어. 그마저도 아저씨는 복잡해서 머리가 아팠는지 한참이나 조그마한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져라 보더니, 가지고 온 합의서에 무언가 메모하고서 다시 작성해서 가지고 오겠다고 하더라. 그런데 안 나가고 가게 문 앞에서 쭈뼛대고 있길래 왜 그러시냐 물어보니까


"그... 합의 금액은..."


그래. 합의 금액이 중요하지. 그런데 뭐, 나는 그냥 이 아저씨가 진심인 것 같다는 게 중요했어.


"됐어요. 운 좋았다고 생각하시고 앞으로 실수하지 않으시면 돼요."


물론 내가 잘못한 것도 없고, 어머니껜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 사실을 알게 되시고 내가 맞음으로 어머니가 속상해하실 것을 생각하면 합의금을 받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만... 일 하는데 지장을 줄 만큼 많이 다치지도 않았고, 내가 누군가를 대가 없이 용서한다면 언젠가 내가 실수했을 때 용서받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 멋있으니까. 용서라는 게.


용서라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순간이 쉽게 찾아오지 않을뿐더러, 마음먹고 용서해야 한다면 그건 엄청 큰 일일 테니까. 그런데 다행히 내 좁은 마음으로도 용서할 수 있는 적당히 큰일이 찾아왔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지(물론 합의금 대신에 아저씨가 새로 가지고 온 합의서를 가지고 날 찾아왔을 때 일장 연설을 했다는 것은 안 비밀이지만 ㅋㅋ).


그렇게 내 생의 첫 폭행사건은 마무리가 됐고, 소문이 났는지 이 사건을 기점으로 가게에서 담배를 피운다거나 억지로 술을 마시고 가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어. 사실 나야 참으면 그만이지만 이곳에서 함께 일하시는 어머니와 다른 스텝분들이 이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주 긍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었지.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됐냐고? 다양하고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담배는 꼭 우리 집에서 사 가고 계셔. 담배를 사가면서 가게에 들렀을 때 자기가 아는 사람이 시식대에서 뭔가를 먹고 갈 때면 깨끗하게 먹고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잔소리와 함께 ㅋㅋ


장사돈은 개도 안 물어간다던데, 이번 사건으로 그 이유를 어느 때보다 실감할 수 있었어. 요즘 SNS에서 진상 손님에게 속 시원한 대처를 하는 상황극이나 실화인 영상들이 한 번씩 올라오곤 하는데, 사실 장사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 물론 반말하는 손놈에게 똑같이 반말로 응대하는 그런 영상들을 보면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속이 풀리는 것 같지만, 현실은 아무리 상대가 안하무인이라도 자영업은 손님이 끊기면 밥줄이 끊기는 것이라 감정을 죽이고 서비스를 해야 하거든. 욕을 좀 먹고 마음이 좀 상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참을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은 안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더라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가 싶다가도 한편으론 그런 게 어른이라면 조금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이쯤에서 손님에게 맞으면서 어른이 돼 가는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음번엔 조금 밝은 이야기로 찾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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