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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야 Oct 15. 2024

여치

원치 않는 동거

# 여름날, 여치가 숨어들었다.


뜨거운 여름.

온갖 풀벌레 소리가 논밭을 가득 메우는 시절이다.

현관만 열면 바로 풀이 보이는 나의 집.

벌레들이 호시탐탐 공략을 하려 든다.


어느 틈에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집 안 어딘가에 여치가 자리를 잡았다.

여치 소리가 밖에서 들리면 운치 있지만 집 안에서 들리면 매우 고역스럽다.

잘 숨기로 유명한 친구이니 아무리 소리 나는 쪽을 둘러보아도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소리도 사방으로 퍼지듯 들리니 소리로만 위치를 추리해내기엔 나의 귀가 너무 하찮다.

눈치는 또 얼마나 빠삭한지 근처에 다가가면 금세 소리를 멈춘다.

그러니 가족들이 왔다 갔다 하는 낮에는 없는 듯 조용히 있다가, 저녁이 되어 가족들이 쉬려고 할 때쯤이면 그제야 본격적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거참, 매우 난감하군


# 여치에 대해


여치의 소리는 수컷이 암컷을 유인하거나, 암컷에짝짓기를 요구하기 위해 내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집에 숨어든 여치는 암수 다정한 커플이어서 매일 짝짓기를 요구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일까.

아니면 수컷 한 마리가 나가지도 못하고 집안에 갇혀 구슬프게 창 밖을 내다보며 자신의 짝을 불러대는 것일까.


나는 그를 가둔 적이 없건만, 제발 밖으로 나가 저 우거진 풀숲 안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면 안 되겠니.


어떤 연구결과에 의하면 여치 소리가 우울감을 낮춰 정서적 안정감을 갖게 한다고 한다.

사람의 지치고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나.

아무래도 나는 과학적 사례를 벗어나는 인물이 되는 모양이다.

며칠 밤을 들었더니 우울감이 사라지기는커녕 스트레스가 쌓여 없던 우울증도 생길 판이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여치 소리는 음률이 담긴 듯 곱기까지 한데

집 안에서 들리는 여치 소리는 왜 이리도 다른 것일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여치도 마찬가지다.


여름은 풀밭에서 여치가 대장 역할을 하는 때다.

다른 곤충들보다 먼저 성충이 되기 때문이다.

포악한 사마귀도 이 시기엔 아기일 뿐이니 여치에겐 한입거리.

메뚜기도 사마귀도 다 이겨먹으며 포식자로 군림할 수 있는 시기를 이 집구석 어딘가에 콕 박혀 숨어 지내야 하는 나의 여치(어느새 나의 여치가 되었다)는 얼마나 서러우려나.

어서 탈출구를 찾아내어 저 넓은 풀밭에서 맹위를 떨치기를.


우리 서로 자유로워지자. 제발!


우리 집 창밖으로 보이는 텃밭. 여치에게 말하고 싶었다. 저기가 너의 살 곳이라고, 고이 보내줄 테니 제발 내 앞에 나타나달라고.

# 가을에 안녕.


어느 때부터인가 여치 소리가 사라졌다.

그 뜨겁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스며들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성체가 된 여치는 몇 주에서 몇 달 정도를 산다고 하니 숨어있던 그곳에서 홀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거나 극적으로 틈을 발견하고 밖으로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짧은 생(인간 기준에서만 짧은 것이겠지만)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이 집안에서 나의 구박을 받으며 보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낀다.


가을에 쓸쓸히 안녕을 고하며,

내년 여름엔 부디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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