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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야 Oct 04. 2024

어린 왕자가 되었다

저녁노을을 볼 때면 그가 떠오른다

# 어린 왕자를 좋아했던 소녀


어린 왕자의 별은 작아서, 의자를 조금만 움직이면 하루종일 노을을 볼 수 있었다지.

학창 시절, 어린 왕자를 좋아해 매년 꼭 한 번씩 어린 왕자 책을 읽곤 했다.
어느 해에는 여우에게 빠졌다가, 어느 해에는 장미에게 빠졌다가, 어느 해에는 가로등 불을 껐다 켰다 하는 어느 별의 아저씨에게 빠졌다.

매해 조금씩 달랐지만 그래도 항상 변함없이 좋아하는 부분 있다면, 그건 어린 왕자의 노을이었다.
하루종일 의자를 돌려가며 노을을 볼 수 있다니.

그건 너무 부럽잖아.


그렇게 어린 왕자를 매년 찾던 소녀는 언제부터인가 어린 왕자를 잊었고,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던 어린 왕자의 노을도 희미해졌다.


여우와 장미와 노을에 마음을 한껏 내주던 소녀는,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술을 마시고 화를 내고 지치기도 하며 그렇게 마음을 다른 것들로 채웠다.


# 시골은 어린 왕자를 다시 찾게 만들지


시골에서 살게 된 후,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자연에 가까워지면 당연스레 하늘도 가까워진다.

하늘을 보다 보니 노을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되고 문득 다시 어린 왕자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옥상에 앉아 어린 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노을을 본다

세월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는 남루한 옥상벽과 방수페이트가 벗겨진 바닥.


이 허름한 옥상이 어린 왕자의 별보다 더 넓고 편할걸!

여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도, 바오밥나무도 없으니 훨씬 났지!


옥상에 의자를 두고 앉아 노을을 바라본다.

어린 왕자는 이렇게 노을을 바라봤을까? 그 작은 별에서 혼자인 게 슬펐을까?

나는 지금 여기서 행복한가?


어린왕자가 되어보려는 찰나, 나의 아이들이 배고프다며 나를 불러댄다.

혼자였던 어린 왕자가 살짝 부러워지려 한다.

아이들의 부름에 서둘러 의자를 챙겨 내려가며 시 생각해보니...

어린 왕자는 혼자가 아니라 장미가 있었지.

까탈스럽고 서툰데 그게 매력인 장미.

나의 아이들은 다행히 그리 까탈스럽지 않고 애정 표현도 넘치니 이것도 내가 더 났다.


어린 왕자를 이겨먹어서 뭐 하겠다고 계속 더 나은 걸 찾는지 모르겠다.


#나의 어린 왕자


나의 아이도 노을을 좋아한다.

노을 지는 시간이 되면 허름한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본다.

하늘이 붉어지고 아이는 그 작고 조용한 곳에서 어린 왕자가 된다.

오래된 시골집의 너저분한 옥상은 어른들 눈에는 '큰돈 들여 벗겨내고 새로 칠을 해야 하는' 걱정거리지만

아이에겐 어린 왕자의 그 작은 별처럼 자신만이 존재하는 평온한 공간이다.


어린 왕자에겐 까탈스러운 장미 친구가 있었고

나의 어린 왕자에겐 덜 까탈스러운 고양이 친구들이 있다.

마당에서 놀다가도 나의 어린 왕자가 옥상에 올라가면 쫄랑쫄랑 따라 올라가 함께 노을을 구경한다.


고양이들이 지붕 위로 폴짝 뛰어내리거나 우다다 달리면 집 안에서는 퉁퉁퉁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참으로 귀여운 조합이다.


농장일을 하느라 땀을 많이 흘리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던 날.

집에 들어서자마자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쓰레기 수거 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분리수거해 놓은 쓰레기들을 주섬주섬 정리하여 또 분주히 수거장을 오갔다.

얼굴이 식을 새가 없었다.


쓰레기를 모두 정리하고 한숨 돌리니 하늘은 붉게 변해가고 있었고, 그 하늘을 나의 어린 왕자와 고양이들이 바라보고 있었고, 그 모습 예뻐 사진에 담고 있으려니 그제야 얼굴이 식어갔다.

저 하늘의 노을은 누군가의 열기와 한숨을 다 몰고 가느라 그리도 붉었나 보다.

나의 열기와 한숨은 하늘이 다 몰고 가버렸으니 나는 다정해진 마음으로 나의 어린 왕자를 부른다.


"이제 그만 내려와, 어두워진다. 모기 물려~"

시골의 밤은 무척 깜깜하고 새카만 모기들은 엄청 많으니 낭만은 거기까지!


노을이 지나갔으니, 이제 잠자리에 누워 같이 어린 왕자나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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