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만들어내는 그림
# 꽃씨를 따라 길이 되어간다
우리 농장에 꽃길을 만들고 있다.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꽃씨가 떨어져 새싹이 나면 그 새싹의 흔적을 따라 벽돌로 경계를 만든다.
우연을 좋아한다.
계획도 좋아하지만, 우연이 만들어내는 예상치 못한 그림이 훨씬 재미있다.
계획하지 않는 느슨한 자의 변명일지 모르겠으나, 내가 세운 계획보다 꽃씨의 흐름을 졸졸 따라가는 것이 더 멋진 풍경이 되니 그리 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엔가, 걷는 것도 숨이 차 힘들어하는 나의 할머니가 국화 몇 줄기를 뽑아와 이 꽃길에 심어놓으셨다.
내 머릿속에는 없던 새로운 구역의 출현이다!
이곳을 어떻게 꾸밀지 정해진 계획이 있었다면 할머니의 돌발적인 구역 확보는 방해라고 느껴졌을지 모른다.
계획이 없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흔적을 담는 꽃길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누워만 있는 건 사는 것 같지 않은 나의 할머니.
그 느린 걸음과 손놀림으로 국화를 심어야만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긴 할머니의 삶이었고, 그 힘으로 자식들과 이 나라를 지켜내 왔다.
힘드시니 아무것도 하시지 말라 해도 끝끝내 잔소리를 얹어가며 무언가를 하신다.
쇠약해져 가는 할머니의 신체는 감히 할머니의 정신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할머니가 심어놓은 국화를 따라 꽃길을 연장했다.
할머니의 흔적은 길이 되었고, 그 흔적 안에서 꽃이 피고 질 것이다.
국화는 뿌리로 잘 번식하는 꽃이어서 참 마음에 든다.
할머니를 직접 볼 수 없는 날에도, 존재의 증거가 되는 흔적이 되어주겠지.
계획 없이 우연을 따라가다 보니 흔적을 담아내는 꽃길이 되었다.
# 배롱나무도!
나의 엄마는 할머니의 국화가 있는 곳 근처에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고 싶다고 했다.
뜨거운 여름을 살만하다 느끼게 해주는 배롱나무 꽃.
뜬금없는 엄마의 제안에 마음이 동한다.
까짓어 심어봅시다!
우리 농장에 있는 배롱나무들은 모두 분홍 꽃을 피우니 이번엔 강렬한 빨간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로 심어볼까!
즉흥적으로 나무 한 그루를 그곳에 심기로 결정한다.
즉흥적인 엄마와 딸은 이렇게 별 계획 없이 농장을 꾸려간다.
즉흥적임은 미래를 예상 할 수 없게하고, 그래서 더 재미난 오늘이 된다.
이 꽃길에는 할머니의 국화도, 엄마의 배롱나무도, 나의 재미도 함께 녹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