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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rtonCottage May 15. 2016

혼자 걷는 여행@윔블던

박물관, 미술관, 테니스 말고

혼자 여행을 할 때면 많은 관광지를 점찍기 보다는 느리게 걸으며 거리와 골목들을 감상하고 그 도시 사람들의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가이드 책과 지도를 접어둔 채 도시의 공기와 습기를 온몸으로 끌어안을 듯 풍경을 훑으며 한없이 걷는다. 그럴 요량으로 윔블던을 찾았다.


윔블던은 아마도 런던을 통독한다는 기분으로 여행을 해야 발을 딛을까 말까 고민해볼 만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NW, W, E, SW 등으로 시작하는 런던 우편번호의 알파벳들은 동쪽, 남서쪽 등과 같은 방위를 나타내며 알파벳의 뒤에 오는 숫자가 1에서부터 높아질수록 중심지로부터 거리가 멀어짐을 뜻하는데 윔블던은 무려 SW뒤의 숫자가 19이다. 그만큼 런던 중심지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외곽임을 뜻한다. 기차로 워털루까지 약 20분, 초록색 디스트릭트 라인으로 웨스트민스터까지는 약 3,40분 정도가 걸린다. 하루가 아깝고 일분일초의 흐름이 안타까운 멀리서 온 여행자들에게는 이 공간, 시간적 거리 때문에 논외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여행자가 윔블던을 걸으면 어떻겠냐고 묻는다면 '느리고 깊이 없는 여행도 괜찮나?'라고 반문할 것이다. 저쪽의 대답이 Yes라면 이쪽의 대답도 Yes다.


런던 남서쪽 마을 윔블던은 아주 시골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히 번화했고 도시라고 하기에는 많이 푸르다. 또한 복잡한 곳이 아니어서 지도가 딱히 필요하지도 않다. 런던에서 Hill, 언덕, 위에 위치한 마을들은 대게 부촌인 경우가 많은데 윔블던에도 Hill이 있다. 이 언덕 위에 위치한 마을을 윔블던 빌리지라고 따로 부른다. 1838년 윔블던에 철도가 깔리기 전까지 윔블던 빌리지가 윔블던의 전부였다고 한다. 언덕 아래에는 뉴 윔블던 시어터와 폴카 극장의 존재 때문인지 브로드웨이라는 길이 쭉 이어져있다.

윔블던 역사 맞은편에서 93번 버스에 승차하니  빨간 이층 버스는 윔블던 힐 로드를 따라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언덕을 올라갔고 금세 빌리지의 풍경이 나타난다. 언덕에 오르자마자 버스에서 내려 거리를 둘러보니 부촌이라 그런 건지 언덕 아래에 즐비했던 패스트푸드점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윔블도니안들이 프렌치 카페나 레스토랑의 노천 테이블에 앉아 브런치를 즐긴다. 유난히 프렌치 이름의 카페나 레스토랑들이 많이 눈에 띈다.

 


아무렇게나 진열된 빵들마저 감성적인 아티잔 베이커리를 지나니 소담스레 담겨 옹기종기 모여있는 분홍 작약들이 예쁘고 탐스럽게 길 위에 이어진다. 을 강조하기 위한 무채색 소품들마저 보인다.

@Gardenia

 트레이더 앤틱 샵 앞에는 세월이 많이 느껴지는 망아지 한 마리가 천연덕스럽게 서있고 가게 안의 또 다른 녀석은 이미 팔렸는지 'SOLD' 표시를 주인이 달아주고 있었다. 앤틱 물건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어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다면 좋겠군 하며 쭈욱 훑어보지만 역시나 내 눈은 보물을 찾지 못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여느 동네들처럼 알록달록 먹음직스러운 과일가게를 비롯한 각종 상점들이 이어지고 런던에 흔하디 흔한 채러티 샵들이 종종 보인다.

@Trader's Antiques
가족이 있는 풍경. 사람과 사람, 혹은 개와 사람.
함께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대략 1650년경 지어진 로즈 앤 크라운 호텔처럼 빌리지의 건물들은 200년, 300년 정도 빈티지인 경우가 대다수라고 한다. 몇 백 년 전의 모습을 한 건물에서 오늘을 살고, 그 안에서 일하고 먹고 웃는 런더너들이 새삼 부럽다. 옛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삶.


런던의 리치먼드 파크나 하이드 파크에서도 승마를 즐길 수 있는데 윔블던에서 마주친 승마 무리는 특이하게도 말을 타고 차도로 향하고 있었다. 말 위에 올라탄 사람들은 무척 신나 보였다. 21세기식 이동수단이 아닌 것을 타고 승용차들 사이를 주행하는 것은 왠지 짜릿할 듯.

 

오랜만에 만난 동네 서점이 눈에 띈다. 모처럼 본 동네 서점이라서 눈길이 가기도 했지만 디스플레이해놓은 인어공주 팝업북이 서점 안으로 이끌었다. 유난히 어린이 책들이 많은 서점의 한켠에서 팝업북들을 하나씩 펼치니 마치 어렸을 때 책을 읽으며 그렸던 상상이 실현되는 것 같다. 결국 피터팬 팝업북 하나를 구매하고야 말았다.

@Wimbledon Books
인어공주 팝업북


윔블던 북스토어의 맞은편 펫 파빌리온이라는 반려견 용품 상점웬 영국 국기들이 떼로 펼쳐져 있어 가까이 가보니 영국 여왕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상점 창을 듬뿍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유기농  사료로 유명한 릴리 키친에서 여왕 생일을 축하하고자 기념 캔 사료를 따로 만들기까지 하다니 영국인들의 여왕 사랑이 알만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도 속으로든 겉으로든 이렇게 사랑할만한 왕실이 있으면 싶기도 하다.

@Pet Pavillion


하이스트리트를 벗어나면 탁 트인 초록 잔디와 러쉬 미어 폰드가 나타난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주로 개 산책을 시키고 조깅, 승마도 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카니자로 하우스와 공원이 자리한다. 담백하고 우아한 멋을 가진 하얀 카니자로 하우스는 현재 호텔로 쓰이고 있지만 18세기부터 여러 귀족들이 거주했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거주인들만의 개인정원이었던 공간을 윔블던 시에서 사들인 후 일반 시민에게 개방하면서 카니자로 공원이 생겼다. 윔블도니안들은 아무래도 이 공원을 무척 아끼는 듯하다. 작은 동네 공원 치고는 이례적으로 공원 가꾸기 봉사모임을 가지고, 공원 투어 가이드도 해준다고 하니 말이다.


귀족들의 정원이었던 이곳의 오래된 나무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인데 여기저기 꽃들이 아직도 피어있어 운 좋게도 때늦은 꽃놀이의 호사를 누렸다. 며칠 동안 내린 폭우로 이제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구나하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올해 유일한 꽃구경이었다. 규모가 아주 큰 공원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게 구성된 것이 산책하는 내내 지루하지가 않다. 런던에서 보기 흔치 않은 꽃들이 계절의 막바지에 만발한 풍경에 눈이 실컷 호강했다.

'Who loved this park'


누군가가 남겨놓고 떠난 의자에 쓰인 글처럼 사랑할만한 공원이다. 언젠가 생을 다할 때까지 아무것도 남겨놓을 무엇이 없다면 이렇게 내 뒤를 걷던 어떤 이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하나를 남겨놓고 떠나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일었다.  그것도 이처럼 아름다운 공원에.


테니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윔블던 하면 테니스지 하며 윔블던 테니스 뮤지엄으로 향했다. 경기는 7월에 열리는데 벌써 단체 관광객들이 꽤 방문하여 투어를 하고 있었다. 두어 달 앞으로 다가온 경기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막상 와보니 경기중에 텐트와 침낭을 가져와 밤새 줄을 선다고 하는 그 대열에 동참해볼까 하는 생각이 슬쩍 든다.


빌리지로 돌아와 Cote에서 늦은 점심을 하고 에서 디저트로 에클레어와 핫초코 한잔을 했다. Cote는 프랜차이즈인지라 진짜 프렌치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면이 있지만 가볍게 먹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폴의 빵은 영국의 그것들보다는 맛있지만 사실 파리의 빵맛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핫초코는 길 모퉁이에 있는 Le pain이 더 맛있다.


언덕을 다 내려가면 윔블던 도서관이 나온다. 어느 동네에나 있는 작은 도서관이지만 이곳에는 앙증맞고 위트 있는 장식이 있다. 1887년 처음 문을 연 이 오래된 도서관의 건물 외벽에는 책장에 작은 책들이 꽂혀있는 듯한 장식이 있는데 1995년 윔블던 아트 스쿨 졸업생, 무하마드 샤이바니의 작품이라고 한다. 19세기의 건물이 20세기 사람의 손으로 완성된 셈이다.



역을 지나 브로드웨이 길 양 옆으로는 온갖 국적의 레스토랑들이 늘어서있다. 타이, 일본, 이탈리아, 멕시코, 브라질, 인도, 포르투갈, 레바논 등등 다양한 나라의 먹거리들을 놓고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중 플립 앤 딥이라는 햄버거집에서는 틴에 담겨 나오는 셰이크, 두툼한 진짜 고기 패티와 칠리가 들어간 햄버거, 치즈와 그레이비를 잔뜩 뿌린 캐나다 푸틴 스타일의 칩스를 먹을 수 있는데 꽤 맛있다. 특히 칠리가 들어간 햄버거는 매콤해 외국 여행 중의 느끼함을 해소하고 싶을 때 괜찮은 선택 일 수 있다.


브로드웨이라는 길 이름이 존재하는 이유인 뉴 윔블던 시어터. 에드워디안 건축물인 뉴 윔블던 시어터는 영국에서 역사적으로 특별하고 의미 있는 건축물을 꼽는 리스트인 Grade II에 올라있는데 흥미로운 이야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 건물 꼭대기에 있는 천사와 구 조각이 2차 세계대전중에 잠시 철거되었었고 그 이유가 독일군들이 조각을 표적 삼아 마을의 중심가를 공격하기 쉬울 거라는 염려 때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에도 공연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전쟁 중에 더욱 인기가 많았던 나머지 다수의 유명 배우들이 이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상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 유령의 출몰이다. 유령 목격담은 196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대부분이 관객들에 의한 것이고 같은 모습의 유령이었다고 한다. 유령은 검은색 에드워디안 복색을 하고 특정 좌석에 앉아있기도 하고 복도를 걸어 다니거나 관객을 쳐다보다 사라진다고 한다. 사람들은 유령의 옷차림이나 출몰하는 장소로 미루어 극장의 창립멤버인 Mulholland라고 추정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마치 팬텀 오브 오페라처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다. 현재는 일 년 내내 다양한 작품들이 웨스트엔드에서보다 조금 저렴하게 공연되고 있다. 슬라바 스노우 쇼, 헤어드레서, 캣츠 등등.


브로드웨이를 끝으로 윔블던에서의 짧은 도보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윔블던의 상징은 테니스고, 사라포바가 떠오르고 그래서 왠지 모르게 휑한 스테디움만 자리할  같지만 이 작은 마을의 길은 자연, 역사, 문화와 사람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여러 가지 것들로 차있었다.

알렉산드라 펍, 퇴근시간무렵이면 윔블도니안들로 꽉 찬 루프테라스가 시끌시끌하다.

느리게 걸으며 마주친 사람들의 순간들과 윔블도니안들의 , 감성 어린 거리의 풍경을 눈에 가득 담은 채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몇 가지 여행 정보들.


윔블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윔블던 뮤지엄으로.

주소 ; 22 Ridgway, Wimbledon, London SW19 4QN 

http://www.wimbledonmuseum.org.uk



테니스에 관심이 있다면 윔블던 테니스 뮤지엄에서 투어를.

2016년 윔블던 테니스 - 6월 27일~7월 10일

주소 -Church road, London SW19 5AE

윔블던 역에서 버스 이용 시 493번 버스. 경기중에는 테니스 경기장 전용 이층 버스가 역 앞에 대기.

http://www.wimbledon.com/en_GB/museum_and_tours/


액티비티를 좋아한다면 승마를.

윔블던 스테이블에서 승마를 즐길 수 있다. 단, 초보라면 바로 말을 탈 순 없음.

주소 -Wimbledon Village Stables 24a/b High Street Wimbledon SW19 5DX
Tel:020 8946 8579 admin@wvstables.com

http://www.wvstables.com/


좀 특별한 여행을 하고 싶다면 할로윈에 고스트 투.

매년 핼러윈 시즌 중 딱 하루 윔블던에서 할로윈 고스트 투어를 한다.

티켓은 와인이나 맥주 한잔을 포함 대략 11-13파운드 정도.

아직 2016년 티켓이 오픈되지 않았음.

http://www.atgtickets.com/shows/ghost-walk-2015/other-events-wimble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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