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태어난 지 만 6년이 되던 해였다. 그때, 그 시점부터 나의 모든 삶, 또 우리 네 식구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그 해 어느 날 아침, 어느때와 같이 유치원을 다녀왔을 때였다. 갑자기 사물을 보는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사물이 하나로 보이지 않고 두 개가 겹쳐서 보였다. 우리 부모님은 처음엔 유치원이나 학원을 가기 싫어서 꾀병 부린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그러나 증상은 계속 지속되었고 동네에서 큰 안과를 가게 되었고 CT까지 찍게 되었다. 의사 분께서 종양을 발견하셨고 큰 병원으로 가라고 진단서를 써 주셨다. 부모님은 모든 지인분들을 통해 잘 보는 교수님과 큰 대학병원을 수소문하고 다니셨다. 한 병원으로 결정되었고 검사 후 뇌에 종양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 입원을 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미열이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입원하지 못했고 지인 분들께 도움을 받아 입원하게 되었다. 교수님 말씀으로는 좀만 늦었으면 시력을 잃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부모님은 부모가 된 지 약 10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부모가 되어도 그 맘을 다 헤아리진 못하겠지만 얼마나 마음 졸이고 당황하셨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해 생일 전날 혹은 당일에 수술을 위해 이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있었다. 엉엉 울면서 이발했다. 수술에 들어간 나는 13시간의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목에 호스가 있었는지 목이 아프고 뻑뻑했다. 첫 식사로 죽이 나왔는데 24시간의 공복과 13시간의 수술로 허기가 져서 죽 대신 밥을 요청해 밥을 먹었다. 부모님은 안도를 하셨고, 간호원분들은 다소 놀라셨을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식욕은 대단했다. 수술 전, IQ 테스트를 받으라고 해서 IQ 테스트를 받으러 갔던 점이 기억에 남는다. 140 정도로 나름 높은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종종 그 높은 IQ로 살았다면 지금 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상상해보고는 한다.
두개인두종
담당교수님은 이 질병이 유아기에 종종 발견되는 질병이라고 하셨는데 아직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뇌종양은 소아 시기에 발견되는 종양 중 2위라고 하지만 청소년 시기에는 항상 '왜 나한테 이런 질병이 찾아온 걸까? 그 많고 많은 아이들 중에...'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이 질병은 수술로 치료가 되었어도 언제든 종양이 재발될 수 있는 질병이다. 수술이 성공적이었지만 재발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갖고 살아야 했다. 정상이 되었지만 완벽한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정기적으로 진료와 검사를 받고 있다. 그러던 중 내가 수술한 지 약 7년 지났을 무렵, 동일 질병 환자로부터 재발이라는 안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심장이 쿵 떨어질 듯 놀랐다. '나도 재발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과 다른 한편으로는 참 이기적이고 잔인하게도 '휴, 내가 재발된 게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공존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재발되지 않았지만 나의 머릿속 깊은 곳에는 작게재발에 대한 걱정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또한 수술로 인해 호르몬을 분비해주는 뇌하수체 쪽에 문제가 생겼고 그로 인해 호르몬 불균형으로 아직까지도 약을 복용하고 있다. 의학이 얼마나 발전할지 알 수 없지만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약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면 참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항상 졸고 잠잤고, 시험 중에 졸도를 하기도 했다. 배부름을 느끼는 호르몬 분비에도 문제가 있어 끊임없이 먹었고 그때부터 내 몸은 불어갔다. 뚱뚱해지면서 항상 왕따를 당해왔고 좋은 기억은 거의 없었다. 내 27년 인생 중 20년을 뚱뚱한 비만 상태로 보냈고 보내고 있다.
수술, 그 때 이후
퇴원 후 통원 치료를 시작하면서 수술과 진료, 치료 등의 비용 때문에 부모님은 사업을 하시려고 알아보고 다니셨고 우리 어머니께서 다른 음식점에 음식을 배우러 다니셨다. 이때부터 우리 가족의 삶이 많이 바뀌었다. 부모님은 음식점을 창업하셔서 사업에 전념하셨고 나는 두 분이 돌아오시기 만을 기다리다가 저녁 늦게 잠이 들었다. 나와 부모님은 장거리 커플 혹은 주말 부부처럼 서로 애틋했다. 두 분은 아픈 손가락인 나만을 걱정하셨고 나는 부모님이 힘드실까 봐 걱정했다. 그 때문인지 누나는 부모님의 케어를 많이 받지 못했고 부모님과 조금씩 멀어졌다.
불효자인 나는 이런 문제들로 인해 종종 '그때, 수술하다가 죽었어야 했어. 그때가 딱 죽기에 좋은 시점이었어.'라는 생각을 종종 해왔다. 왕따였던 나는 당연하게도 자존감이란 없었고 항상 수술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때를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았고 행복했던 때라고 기억한다. 지금 누군가 타임머신을 준다면 망설임 없이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거의 모든 선생님들께 항상 자거나 졸던 학생으로 기억되는 나는 당연하게도 수능은 망쳤다. 물론 수능 당일, 늦게 되어 경찰차 타고 시험장에 간 것에 대한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재수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그 당시 또 건강 관련하여 통원을 계속해야 했기에 점수 맞춰 적당히 전문대로 입학을 했다. 고등학생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역사였다. 그렇기에 사학과로 진학을 희망했지만 점수 때문에 컴퓨터 관련 학과로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사학과에 갔다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내 경험들을 사실대로 자세히 적는 이유는 어려움을 겪었던 나 또한 나름대로 잘 나아가고 있기에 혹시나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면 조금이라도 위로 또는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내가 겪은 어려움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남들과 달랐기에 남들보다 빨랐던 나의 20대가 저물기 전에 내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그동안 브런치에서 글을 읽으면서 정보를 얻었을 때도 있었지만 글을 읽으면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없었던 솔직한 내용을 브런치에는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경험을 담은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정보를 수집하시거나 위로를 받아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