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째 날이 밝았다. 침대가 없는 작은 방이었지만 바닥 난방을 뜨끈뜨끈하게 잘 해주신 덕에 피로감 없이 잘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의 루트는 해파랑길 36코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전혀 바닷길이 아니다. 정동진역에서 시작해 안인항까지 이어지는 전체 길이 산길이다. 해발 343.7m인 괘방산을 넘어야 했다. 해변을 따라 기찻길이 놓여 있고, '율곡로'라는 국도(지방도일 수도?)가 이어져 있긴 한데 찻길을 따라 걷는 건 아무래도 위험해서 코스를 이렇게 짠 듯했다. 물론 자전거 여행자라면 율곡로를 따라 주욱 이동해도 괜찮을 듯하다.
출처는 당연히 네이버 지도
짐을 챙겨 나와 정동진역 근처의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산에서 먹을 행동식도 챙겼다. 맥스봉 소시지, 삼각김밥, 콜라, 구운 달걀 등등.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해파랑길 표시 리본을 따라 가보니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나왔다. 등산화도 신지 않았고, 보통 산에 갈 때보다 무거운 배낭을 멘 터라 살짝 걱정이 됐다. 평소 서울에서 산을 오를 때는 정말 작은 배낭에 물과 간식 조금을 넣는 게 다여서, 옷가지와 각종 짐이 들어 있는 배낭을 메고 잘 걸을 수 있을까. 일단 가 보자.
산길을 걸으니 금방 더워져서(저래뵈도 저때는 아직 2월이었다. 2월의 끝물이긴 했지만) 겉옷을 주섬주섬 벗어 배낭 위에 끼워 넣었다. 요새는 아웃도어 활동을 할 때 얇은 옷을 여러 겹 껴 입는 걸 '레이어링'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그렇게 단어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들이 자연으로 뛰쳐나온다는 의미일 듯하다. 코로나19,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다. 괘방산 자체는 오를 만했다. 어느 정도 야외 활동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니, 해파랑길을 걷기로 마음먹으신 분들이라면 얼마든지 주파가 가능할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36코스에 임하시길.
그리고 바닷길이 아니라 살짝 아쉬울 법도 하지만 등산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높은 곳에서 보이는 '부감' 풍경이 아닐까. 어느 정도 올라가니 옆으로 동해가 짠! 하고 나타났다. 정말 우리나라 동해가 최고다. 말이 필요 없지. 산 타느라 긴장한 근육이 쫘아악 이완되는 풍경. 이 맛에 산 탄다.
위 사진 오른쪽 상단쯤에 뭔가 하얀 건물이 보이는가. 정동진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저것은 정동진의 랜드마크 '썬크루즈 호텔'이다. 그곳에서 출발해 이렇게 산을 넘어온 것이다. 그 뿌듯함과, 에메랄드빛 바다 색깔과, 산을 넘어왔다는 성취감에 굉장히 취해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불과 두 달 전의 내 모습인데 좀 귀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네.
한껏 본인 뽕에 취해 산을 내려가면 36코스의 종착점인 안인항에 다다른다. 조용하고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거기서 37코스를 더 걸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번 해파랑길 유랑을 마무리하고 버스를 타고 강릉 시내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37코스와 38코스는 바닷길도 아니고 산길도 아닌, 강릉 시골길을 한 바퀴 돌아 시내 쪽으로 들어가는 느낌의 코스라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기도 했다.
첫 해파랑길 유랑에서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안인항에서 버스를 타고 예약한 숙소가 있는 경포 쪽으로 향했다. 참고로 강릉의 시골 쪽을 운행하는 버스들은 배차 간격이 매우 길다. 여기저기 많이 다니시는 분들은 잘 알겠지만 네이버 지도, 카카오맵 등 각종 어플의 도움을 받아서 시간이 너무 뜨지 않게 계획을 잘 세우는 걸 추천드린다.
3일간 줄곧 걷다 버스를 타니 뭔가 문명 세계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까미노를 걸을 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후 그다음 날 피니스테라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들었던 느낌이랄까. 아니, 이렇게 버스로 금방 갈 길을 왜 그렇게 걸었지? 뭐 이런 생각. ^_^
경포 호수 근처로 잡은 숙소는 쉬기에 좋았다. 스파가 있어 노곤한 몸을 풀기에 안성맞춤. 어렸을 때는(20대 때는) 목욕의 개운함과 평온함을 몰랐다. 지금은 가격대만 적당하다면 여행을 갈 때 스파가 있는 숙소를 매우 선호하게 됐다. 하루 종일 열심히 돌아다닌 몸을 쉬게 하기엔 스파만 한 게 없더라. 정말 나이가 드니 알게 되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몸도 서서히 노화되어 가며 예전과는 다른 자극을 원하는 거겠지만. Bittersweet구만!
도착하자마자 스파를 한 판 하고 저녁 식사를 위해 미리 찜해둔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 둘 다 좋아해 마지않는 스페인 음식을 파는 곳. '라 꼬씨나 by 이성용'. La cocina라는 단어 자체가 '요리', '부엌'이라는 뜻이다. 이성용 셰프의 요리, 이성용 셰프의 부엌이라는 말이겠지. (이래 봬도 스페인어 DELE B1 보유자이자 스페인 여행만 3번 갔다 온 사람 나야 나)
무사히 걷기를 마무리하고 스파 한 판 후 맛있는 음식에 와인까지 곁들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정말 식상한 표현이지만 그 이상의 표현도 없다. 해외 입국자 격리가 없어지면 빨리 국제선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겠다는 생각만 잔뜩 하며 와인 한 병을 뚝딱! 나눠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곯아떨어졌다. 정동진에서 시작해 경포에서 마무리한 마지막 날이었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