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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 좀 잡고 살자

폼 좀 잡으면 어때. 사람들은 비웃는 게 아니라 부러워하는 거야.


"있잖아. 난 다시 태어나면 사진작가가 될 거야"

우리 나이 고작 서른이 좀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다음 생을 준비하다니, 참 부지런한 친구다.


"뭘 다시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 지금 하면 안 돼?" 물으니, 친구가 헛웃음을 보였다.

사진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사진 잘 찍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데, 이제와 자기가 무슨 사진작가가 되겠냐며. 괜히 폼이나 잡고 다닌다고 사람들이 비웃을 게 뻔하다고 했다.


뭐든 될 수 있을 줄 알았던 10대를 보내고,

뭐라도 되겠지 낙관하던 20대도 보내고,

이젠 뭘 해도 늦었다는 비관론에 사로잡힌 30대를 보내는 우리.


어렸을 땐 막연히 30대가 되면 하고 싶은 일쯤은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20대 때부터 다져 놓은 길을 흔들림 없이 걷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게 뭐람. 여전히 이 길, 저 길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신세 아닌가.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신세 한탄을 한 게 어느덧 1년 전이다.

지금, 놀랍게도 그녀는 어엿한 사진작가가 됐다.


카메라만 만지작거리길 3개월, 찍는 시늉 좀 하길 3개월, 사진 관련 책을 사 놓고 앞 장만 겨우 들춰 보다 냄비 받침으로 쓴 지 2개월, 사진 수업을 들으며, 꺼져 가던 열정에 힘껏 부채질하며 겨우 불씨를 살려 낸 기간 2개월. 이젠 제법 폼이 난다. 카메라를 어깨에 메는 일이 잦아졌고,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날에는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집 주변을 서성인다.


종종 남들에게도 ‘사진작가님’이라고 불린다. 언니의 결혼식 날 스냅 사진을 찍은 걸 계기로 지인들 본식 스냅, 데이트 스냅도 종종 도맡아 찍더니, 이젠 알음알음 추천해 주는 사람도 생겼다. 사진 공모전에 출품도 해봤지만 한 번도 입상하지 못했다. 속상할만도 한데, 그녀는 당연한 결과라며 실실 웃는다. “난 잘 나가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어. 그래도 지금처럼 하면 나중에 사진으로 용돈 정도 버는 할머니는 될 수 있지 않겠어?그럼 됐지


1년 전, 폼 잡는다고 사람들이 비웃을까 봐 걱정하던 그녀가 달라진 것이다.


폼 좀 잡으면 어때. 근사하잖아.
하기 싫은 일에 찌들어 어깨도 제대로 못 펴고 사는 것보다,
가끔 좋아하는 일도 하며 폼 나게 사는 거.
사람들은 비웃는 게 아니라 부러워하는 거야.


요즘 그녀는 진짜 폼 나게 살고 있다.


 


20대 때 무수히 실패하고 좌절하며
내가 배운 건 세상엔 잘하는 사람들이 넘쳐 나고
꿈은 노력만으로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무슨 글을 쓰겠어?”
“시험에서 계속 떨어지는데 성우는 무슨.”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지금은 너무 늦었어.”

하고 싶은 걸 잘 하지 못하는 나를 보는 게 괴로운 나머지, 하고 싶은 것들을 애써 지워 버리려 다.


그런데 지금은 나도 사진작가 친구처럼 어떻게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이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는 욕심’을 앞서자 가능해졌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가벼워졌다.
덕분에 쓰고 싶은 글과 책을 쓰고, 내 목소리가 쓰일 수 있는 곳에 간다. 망설이기만 하던 새로운 일도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삶에 슬며시 녹여 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삶의 무게를 줄일 수 있다.


어쩌면 행복의 무게는 돈이나 명예, 성공에 따르는 무게보다 훨씬 가뿐한 건지도 모르겠다. 순수한 열정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지쳐 보이지 않고, 어깨가 한결 가벼워 보이는 걸 보면.




물론 살다 보면 또 가끔,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는 욕심'이 '순수한 열정'을 추월할 때도 있다.

그럴 땐,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한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되고 싶은 게 유명한 사진작가인가, 아니면 일상을 여행하듯 즐기는 사진작가인가.  또 큰돈 버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사진찍어 용돈벌이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밥벌이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좋아하는 일을 아예 시도조차 할 필요가 없는 건 아니다. 자꾸 해 보고 자기 능력을 사람들에게 내보이면 직업이 되진 못할지라도 인생의 활력소가 될 수는 있다.


우리에겐 삶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때로 물 위에 뜬 기분으로 가뿐하게 즐길 무언가가 필요하다.




[신간 에세이]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출간 기념 연재였습니다.


다음 글,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10화. 반드시 찾아올 행복 (마지막 연재)

12/12(수)에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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