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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인 Feb 09. 2017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입춘이 지났다.  

사실 뉴스에서 입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전혀 모르고 그냥 지나갈 뻔했다.  

여전히 바람은 아릴 듯 차가웠고, 영상의 기온이었지만 입춘, 그 날의 날씨는 '봄'이 시작된다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으니.

오히려 그날따라 하늘은 우중충하게 어두워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이 불안해 보였고  

미세먼지는 매우 나빴으며, 입춘이라는 말과는 무색하게 좋았던 기분마저 다운시킬 만큼 우울한 날씨였다.  

 오늘이 입춘과 어울릴만한 날씨다.  

기온은 더 낮지만 햇볕이 좋고, 빛 때문에 바람도 살갑게 느껴지고, 창가에 일렁이는 빛을 보며 곧 다가올 봄이 기다려지는 날이다.

    




.    

요 몇 달간 글을 쓰지 않았다.  

그림도 잘 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게으름. 무기력. 나태함    

몇 달 전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나는 조금 많이 우울했다. 감기같이 툭하면 걸리는 우울증이었지만 이번엔 좀 지독한 감기, 독감이었던 것 같다.  

겉모습만 멀쩡했고, 그나마 겉모습이라도 멀쩡해서인지 사람들의 걱정이나 관심은 많이 받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평온해 보이던 겉모습과 다르게 마음속에선 이미 지독한 폭풍우에 모든 게 휩쓸려 더 이상 서 있을 수 조차 없는 상태였지만 잘 웃고, 잘 웃고, 잘 웃었다.   

사실 우울하거나 기분이 불안정하면 '무언가'를 열심히 몰두하거나 바쁘게 만드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다 놔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냥 끝없이 무기력해졌다.     

끊임없이 어떤 생각으로 돌아가고 과부하되어있던 머릿속 회로를 그냥 꺼버렸다.   

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쉽지만, 다들 놓지 않는 이유가 그러하듯 막상 놓고 나서가 조금 힘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뭐라고 이렇게 힘들까.  

그것부터가 참 내가 무언가에 많이도 시달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이나 나태함이라는 것이 게으름이라는 부정적인 바탕 위에 깔려있고,  

주변만 보아도 한시가 바쁘게 바뀌고, 없는 시간마저 쪼개고 쪼개는 그런 당연한 일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에 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한 불안함과 이렇게 가만히만 있어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럼에도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런 퀴퀴한 생각을 하는 것도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 느껴져서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바뀌었다.  

내가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바꾸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많은 것이.   


   

내가 놓고 싶던 것들을 자연스레 하나둘씩 놓아버리고, 정리되지 않던 많은 쓰레기들도 하나둘씩  

정리되며 버려지고 욕실 배수통 속 까맣게 뒤덮여있던 내 머리카락같이 보이지 않았던 머릿속은 조금씩이나마 비어져 숨통이 트여 비로소 내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 다른 것, 다른 일에 덮여 신경 쓸 겨를 조차 없었던 내 생각 , 내일, 내 것들이 조금은 보이기 시작했다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맑아졌다.   

나태함은 달콤했다.  

그리고 조금 씁쓸함이 가셨다 싶어 이제 슬슬 단맛을 그만 맛보고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태함이 무서운 이유가 이 단맛에 중독이 돼서 헤어 나오지 못하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분명 단맛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단맛을 조절하는 것도 나는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조금 씁쓸한 생각도 해야 하고, 또 어느 날은 하루종일 쓰기만 한 일상도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그 쓴맛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태함이 더 달게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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