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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May 02. 2021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홍은전의 <그냥, 사람>을 읽고...

몇 년 전부터 소위 "미니멀리즘"에 꽂힌 나는 방안의 많은 물건들을 정리했다. 일레인 제임스, 곤도 마리에, 사사키 후미오, 도미니크 로로의 단순한 삶에 대한 책들을 섭렵(?)하던 때였다. 가지고 있으면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물건들만 남기고, 나머지들은 기부를 하거나 팔았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지적 허영심에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 일단 샀는데 읽어보니 별로였던 책, 읽었는데 또 읽기는 싫은 책, 마지막으로 읽었는데 또 읽지 못할 것 같은 책들은 내 방에서 모조리 쫓아냈다. 그렇게 홍승은의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와 김탁환의 "거짓말이다"는 앞서 나열한 이유들 중 마지막 이유로 내 책장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단짠단짠 글쓰기의 책 목록을 보고, 중고서점에서 홍승은의 책을 다시 샀다.)


그 책들을 다시 들춰 읽어낼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성폭력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자와 수많은 죽음을 물속에서 지켜본 후 그 아픔의 기억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떠난 자의 이야기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외면하고 싶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등을 바라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오늘 나는 홍은전의 "그냥, 사람"을 읽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고통 속에 남겨진 사람들, 시설과 등급이라는 올가미에 얽혀 살고 있거나 죽어가는 장애인들, 치료는 물론이고 편견 없는 시선은 차치하고라도 동정마저 얻을 수 없는 에이즈 환자들, 나라의 부도나 그 밖의 사정으로 집을 잃은 노숙자들, 권력과 자본의 시선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 사람들, 그 밖의 수많은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그들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누리지 못했다. 권력과 자본의 안위를 위해 숱한 시련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기도 하고, 영문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내놓기도 했다. 목숨을 잃은 후에도 그들 혹은 그들의 가족과 지원자들은 참 많은 것들을 내놓아야 했다. 머리카락, 무릎, 자존심, 목소리, 조용히 쓰기 시작한 글까지…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매체들은 그들의 삶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사람들은 자기 삶을 살아내기 급급하다. 홍은전 작가 또한 그랬던 것처럼 뉴스에서 흘러가는 일들은 나와 무관한 남의 불행이라 생각하고, 그 불행이 내 생활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나 제도와 관련된 싸움으로 다가올 때면 그 불행을 동정하기보다 비난하기 시작한다. 왜 열심히 살고 있는 내 삶에 방해되는 일을 하냐는 적반하장, 안하무인 식의 당당함으로 무장한 채.


지극히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오셨고, 세상 속 아픔에 눈물짓고 기부까지 하시는 우리 부모님도 다르지 않다. 종편 뉴스에 나오는 세월호 유가족을 보며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난리도 아니다.” 그 말에 분노한 나는 뉴스를 볼 때면 부모님과 고성으로 자주 다퉜고, 어느 날부터 나는 부모님과 뉴스 앞에서 절대 대화하지 않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란 것을 깨닫고 실천 중이다. 우리 부모님이 대단히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발언을 하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정도로 성숙(?) 하기도 했고, 대체로 사람들이 뉴스에서 보는 저 일이 하필 그들에게 벌어졌을 뿐이고, 언제든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해서일 것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침묵을 통한 평화 유지 외에 정작 그 아픔들을 보듬기 위해 무언가를 할 용기도 의지도 없는 나에 대한 약간의 실망과 죄책감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제인 제이콥스가 리처드 세넷에게 했던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라는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책에서 리처드 세넷은 도시의 느린 진화를 주장하는 제인 제이콥스와의 대화 중에 수많은 도시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나서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받고, 사실 잘 모르겠다는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땐 몰랐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두 문장 사이에 전혀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알기 때문에’ 떠났다. ‘안다는 것’과 ‘감당한다는 것’ 사이엔 강이 하나 있는데, 알면 알수록 감당하기 힘든 것이 그 강의 속성인지라, 그 말은 그저 그 사이 어디쯤에서 부단히 헤엄치고 있는 사람만이 겨우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영복은 ‘이름다움’이 ‘앎에서 나온 말이며, ‘안다’는 건 대상을 ‘껴안는’ 일이라 했다. 언제든 자기 심장을 찌르려고 칼을 쥔 사람을 껴안는 일, 그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고.” (102쪽)


우선 주변에 있는 아픔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건너편에 있는 감당이라는 목적지에 가기 위해 강둑에서 물장구라도 쳐보아야겠다.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사는 동안 더 나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자 해서인데, 앎에 대한 의지와 욕구만 강렬한 채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진짜 앎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당 가능한 정보와 이야기만 취사선택하는 나의 삶이 소외된 자들의 삶을 왜곡하고, 그들에게 손가락질 해대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는 적반하장식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또 다른 가해자의 모습으로 귀결될까 겁이 난다. 책 속의 숱한 우연과 사건들이 혹여라도 실제 내 삶에 벌어졌을 때, 내가 그들처럼 우아하고 강건하게 삶을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공부를 하고 글을 쓰는 목적이 개인적인 앎과 표현에 그치지 않고 지성을 연마하고 사회적 담론을 만드는 데 있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건 어쩐지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가슴이 점점 벅차올라서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았다. 관객이 되어 바라본 내 청춘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노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것들을 보았다.” (16쪽)


상처부터 치료해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듯 약자가 없어야 강자가 없어진다는 것, 재난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고 외면하지 않아야 재난으로부터 일보 후퇴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채 수만 명에게 읽히는 글을 써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같다. 아직은 지난 내 삶을 되돌아보며 이와 같이 벅찬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공부를 통해 훗날에 내가 살아온 길을 보며 눈물 날 정도로 마음에 든다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 내 가까이에서도 소외받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소외받게 된 배경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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