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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May 21. 2016

당신을 용서합니다, 놓아줍니다

용서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


 용서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돈암동 시장 사거리를 지나던 밤. 장맛비는 차창에 빗금을 그으며 도심에 생채기를 냈으며, 물컹해진 신호등에선 과즙이 흘러내렸다. 아리랑 고개를 잔뜩 구부린 채 오르던 차량은 중턱에서 속도를 줄이곤, 허리를 한껏 폈다. 나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압골끼리 충돌한 자리엔 환란이 분분하게 떨어져, 세계는 물러지고 조금씩 삭아갔다. 비 오는 밤 상념이 짙어지는 것은, 세상이 발효된 때문은 아닐까.


 그때였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들썩였다. 뒤따르던 차 한 대가 꽁무니를 박은 것이다. 놀랄 것 없이 현장을 찍을 휴대폰만 챙겨 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혀를 깨물어 난감한 표정을 취했다. 앞 유리창에 비친 또래의 남성은 하얀 셔츠를 말끔하게 입고 있었다. 그러나 운전석 문을 반쯤 열어둔 채 번잡스러운 몸짓을 이어갔고, 그것은 빗소리만큼 요란했다. 누군가 고삐 풀린 그의 시선을 봤다면, 분명 사건의 피해자로 여겼을 터이다.


 그를 불러 내어 함께 뒷 범퍼로 갔지만, 어슴푸레한 전조등과 걸근거리는 빗방울 탓에 육안으론 확인이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현장은 카메라로 찍어 두었고, 나머지는 절차대로 처리했다. 상대는 처음 겪는 일인지 우물쭈물했고, 차량 번호로 보아 렌터카인 듯싶었다. 보다 못한 나는 렌터카 보험으로 처리할 것을 권했다. 그는 갓 깨어난 새끼 오리처럼 내 말에 따랐고,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헤어져 귀가하는 길. 혹여나 말이 바뀔지 몰라, 사건 내역과 구두로 협의한 사항을 문자 메시지로 상기시켰다. 몇 분 후 단문의 답장과 함께 'ㅋㅋ'가 꼬리처럼 따라왔다. 종전의 물리적인 충돌보다 당혹스러웠다. 생판 부지인 상대임에도 '이 친구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일말의 사과도 없었다. 물론 부상은 없었고 사사로운 감정의 개입 없이, 절차를 따르는 게 선진국 방식이라곤 하지만. 기본적인 매너가 빠진 것에 대해 유감스러웠다. 물리적인 사건보다 불편한 대응 방식 탓에 뒷맛이 시척지근했다.


 주차를 하고 움푹 파인 부분을 확인하려던 차에, 막 귀가한 어머니를 만났다. 사정을 설명하고 함께 들여다보니, 번호판에 달린 나사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고작 50원짜리 동전 크기의 흠집이었으나, 마음엔 50만 원 크기의 구멍이 났다. 그때 어머니께서 "그냥 두자"고 한 마디 하셨다. 나는 무슨 뜻인지 깊이 이해했다. 작은 응어리도 풀렸다. 분명 '감정이라는 말뚝에 묶인 망아지가 되지 말자'는 뜻이었을 터이다. 원한(怨恨), 원망(怨望), 원수(怨讐) 등 상대에게 향한 첨예한 칼끝은, 도리어 내 심장 거죽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사사로운 감정의 매듭을 풀고 빗물에 씻겨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장맛비로 우묵주묵 패인 웅덩이에서 기억 하나가 잘팍거렸다. 1990년 겨울, 어머니는 4살이던 나를 데리고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갔다. 갱지 냄새가 부유하는 실내엔 석유난로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나는 검은색 소파에 앉아 양 볼을 녹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문 기사 한 토막을 변호사 님께 보여드리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도 사고 현장이 찍힌 사진과 기사 하나를 똑똑히 기억한다. 길가에 함부로 나뒹구는 차량 파편이었다. 그것을 목도한 마음엔 고사리처럼 구불구불한 것이 피어오르는 느낌을 받았고, 형언할 수 없이 매스꺼웠다. 이제 와 짐작해보건대 아버지 교통사고와 관련된 판례였을 터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대화며 누런 서류로 가득 찬 방이 시시했고, 아무것도 모른 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을 모를 정도로 어렸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정도로.


 그 겨울의 가해자는 법의 심판을 받은 듯하다. 구체적으로 묻진 않았으나, 정황상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구태여 어머니의 한 떨기 국화꽃처럼 처연했던, 그러나 두 우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빗장을 걸었던 기억을 상기시키고 싶진 않았다.


 사건으로부터 몇 년 후, 지금의 새아버지를 만났고 흐린 기억 위에 행복한 붓으로 덧칠했다. 텅 빈 어둠을 기억하기에 환한 빛을 소중히 여기며, 나아가 양 극단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가해자를 용서했고 내 마음의 창살에서 놓아주었다. 분명 행복하게 웃는 어머니도 같은 생각일 터이다. 나아가 아무도 '원망할 원(怨)' 한자처럼 심장이 감정에 짓눌리지 않길, 나직이 읊조려 본다. 더불어 누군가의 지옥 같은 나날을 감히 헤아려 본다. 하지만 응달에도 볕이 들 수 있음을. 두 눈을 멀게 하는 녹조며 기생하는 이끼 따위를 걷어낼 수 있음을. 그렇게 전하고 싶다. 끝으로 그 사람 또는 불특정 다수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 세 문장뿐.


 "당신을 용서합니다. 실수가 거듭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당신도 너그러운 이가 되길."


* 사진정보: 서울 종로구 및 낙산공원
* 사진 및 글의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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