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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May 15. 2016

손편지에 아로새긴 그대여

사진정보: 2015년 하늘공원


 새벽녘 총총한 성좌를 닮아, 이제는 아득해진 과거. 4년을 만난 첫사랑과 사소한 오해로 이별했다. 그날 밤 유성 하나가 세상을 반으로 찢고 지나갔다. 목도한 것 중, 가장 검게 그을리고 말이 없는 돌덩이. 눈가에서도 뜨거운 기억을 머금은 유성이 흔적을 남기곤 떨어졌다. 세상이 반으로 찢어진 난리 통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몇이나 될까. 그저 혼탁해진 감정을 휘휘 젓기 위해 일상의 시곗바늘을 빠르게 돌릴 뿐이었다. 원심 가속기에 올라탄 심장은 잠시 저항했지만, 곧 동그란 은반을 헛돌며 헛헛함과 그득함의 차이를 분간 못하고 혼미해졌다. 이별은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탐닉하는 커피처럼, 예삿일로 여겼다. 두 음절은 사전 속 뭇 단어 중 하나이거나, 가능하다면 커터 칼로 오려낼 것이었다. 그것은 일찍이 상실을 겪고 습득한 생존의 방법이었다. 사진 필름을 직사광선에 노출시켜 애초에 없었던 사건처럼 은폐하는 것만이, 가족 구성원을 잃고도 무너지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적어도 어렸던 나에겐 그랬다. 같은 방법으로, 그녀와의 흔적도 눈물자국에 번진 편지처럼 먹먹하게 지웠나 갔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상념들도 농익어 갈 무렵. 이별을 미시와 거시를 겸비한 시선으로 성찰해 보았고, 평면적인 사건에 명과 암을 채워 입체적으로 굽어보았다. 만일 그녀가 아니었다면, 내 청춘이라는 채엔 어떤 기억이 걸러졌을까. 싱그러운 사랑 꽃 한 번 피우지 못 했던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어떤 구원자가 먹구름을 젖히고 빛 한 줄기를 그려줬을까, 하고. 종내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초연함만 남았다. 그녀의 사사로운 감정도 붉은 깃발처럼 나부끼다가 바람결에 날아갔다고 들려왔다. 그 무렵 헤어진 우리를 안타깝게 여기던 친구가, 재회를 주선했다. 야근을 하던 중, 그녀로부터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약속을 정했고 20여 일의 기다림이 있었다. 내겐 연극 중간의 암전(暗轉)처럼 길고 칠흑처럼 느껴졌다.


 무대를 기다리는 동안, 회백질 지층에 갇힌 기억을 채굴하기 위해 시추(試錐)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유실된 퍼즐로 인해 빈 공간은 멋대로 왜곡되었고, 그렇게 방치되었다. 그것들을 복원하기 위해 숱한 시도를 했다. 나에겐 단순히 추억일 뿐 아니라, 삶의 토막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수북한 아날로그와 디지털 공간을 솎아 보았으나, 그녀의 흔적은 흥이 올라 껑충껑충 뛴 불길에게 짓밟힌 짚단처럼, 새카만 그을음만 남았다. 소실된 철도를 따라, 한 뼘의 시간이 사멸한 것이다. 맞잡은 손은 끊어질지언정, 시간이나 여타 추억은 오롯이 내 것이라 믿었건만.


 회한과 절망으로 점철된 날을 보내던 중, 불현듯 책상 아래 편지함이 떠올랐다. 하얀 먼지가 층층이 내려앉은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는 기억의 편린(片鱗)이 가득했다. 편린이라는 말 그대로, 비늘처럼 빼곡했다. 각종 기념일, 군 시절, 여타 조각을 잇대어 해진 공간을 짜깁기했다. 글자는 소라고둥을 귀에 가져간 것처럼 굽이굽이 너울 치는 파동을 온전히 품고 있었다. 음성이 귓가에 맴돈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생각한 흔적이 역력했다. 물론 그것은 과거에 귀속된 것이며, 시간이라는 선분을 이루는 한 점(點)에 불과할 터이다. 베어진 대나무 마디를 다시 잇댈 수 없는 것처럼. 떠나간 이별의 계절도 이듬해 어김없이 오겠지만 종전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손편지를 많이 쓰는 편이다. 언젠가의 그녀는 받은 자리에서 편지 봉투를 열었다. 손톱으로 고이 접은 편지지가 환하게 펼쳐지는 순간이면, 고백 직전처럼 시간이 잰걸음으로 허둥대는 것을 느꼈다. 편지지가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 마음을 읽긴 어렵지만, 짐짓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동공을 바짝 조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타자기와 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밀려났다. 행이 바뀌면 한 계단을 내려가고, 앞선 운행을 반복했다. 두 번째 장으로 넘겼다. 그곳에는 생일 축하와 같은 서론이 끝나고, 당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쓰여 있을 터이다. 미끄러져 달리던 눈초리는 역사(驛舍)에 진입한 열차처럼 속도를 늦추었다. 꼿꼿하게 견지하던 자세도 흐트러지더니, 앞니로 엄지 손을 지긋이 물거나 내게 향하던 자세를 옆으로 돌린다. 무언가를 황급히 감추려는 듯이. 잔에 든 얼음이 녹으면서 달그락하고 정적을 깼다. 눈매를 만진 그녀의 검지 끝에 무당벌레처럼 볼록한 것이 묻어 나온 것은 눈물 한 방울이었다. 소파에 엉덩이를 풀썩이거나 잔에 든 음료를 빨대로 어지럽히면서, 괜스레 느슨한 공간에 불협화음을 채웠다. 그리곤 헛기침을 하더니, 장미 봉오리 같은 조밀한 입을 벌려 '감동받았다'는 말을 읊조렸다.


 그녀뿐 아니라, 내게 손편지를 받는 이는 더러 입술을 양옆으로 팽팽하게 당긴 채 앙칼진 음을 길게 끌거나, 눈물을 보였다. 마음의 심도(深度)는 제각각이라 사정은 다르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록 투박한 문장이지만, 화인(火印)처럼 눌러 새긴 진정성 때문은 아닐까. 혈액처럼 소중히 눌러 담은 잉크에 온기가 스며든 것은 아닐까, 하고. 또는 편지를 쓰기 전, 상대를 떠올리거나 몰입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대가 흘리고 간 그림자를 주어 담거나, 심장 고동소리에 내 것의 박자를 맞추고자 한다. 덕분에 태양과 해바라기의 관계처럼, 상대가 발하는 빛깔의 농담과 조금은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온전히 몰입해서 공유한 시간과 추억의 한 토막을 채우곤 한다. 어쩌면 받는 이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읽어 내려가는 눈동자가 젖은 솜뭉치로 변하는 것은, 무심코 베푼 마음 씀씀이를 내가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지난주 친구 나영이가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내 편지를 발견하곤 다시 읽었다고 했다. 뭉클한 감정도 재생되었다고 하는데, 너주레한 짐 바구니 틈에서 감상에 젖었을 얼굴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그녀의 감정이 전파라는 너울을 타고, 버석한 내 마음을 잠식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5월은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현하기 적합한 시기인듯 싶다. 귀가하는 길에 편지지를 하나 구입해야겠다.



* 본글과 일부 연결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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