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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May 29. 2016

자유로가 닿은 곳은 이별이었고

갈대처럼 쓰러진 우리의 기억




 도려내려는 북풍과 두툼한 옷깃의 대립이 첨예하던 겨울. 자유롭게 뻗은 자유로 어느 표지판엔 '개성 17km'라고 쓰여있다. 이는 도로의 무한함을 상징하나, 동시에 무한히 갈 수 없음을 경고한다. 우리는 시선을 돌린 채 말이 없다. 애처롭게 보일 축 처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혹은 다시는 맞잡을 수 없는 상대의 손이 벌써부터 낯설게 느껴졌기에. 몇 시간 뒤면 영원히 그어질 것이라 믿었던 선분도 끊어지고, 꼭짓점에 가닿을 터이다. 무한함이라는 허울을 쓴 자유로처럼. 


 차창 밖 나란히 달리는 것은 한강일까 아니면 서해일까. 카세트테이프처럼 늘어져선 그녀와 함께한 기억을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현재에서 과거로 가없이 재생한다. 조수석 창가에 얼비친 그녀의 고정된 눈빛도 나와 같은 기억이 재생 중일까.


 한여름의 일본. 서쪽 하늘에 뜬 농익은 홍시는, 휘저어 놓은 듯 서서히 묽어졌고 또 물러졌다. 유학 생활의 끝자락에서 그녀와 나는 야간 개장한 고라쿠엔(後楽園) 정원을 산책했다. 우리는 풀벌레 소리가 고즈넉하게 깔린 언덕배기 벤치에 앉아, 형형색색의 불빛이 물든 들판을 바라보았다. 반딧불이처럼 형광빛을 발하는 나고야 성(名古屋城)을 등지고,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을 때였다. 보드라운 그녀의 어깨가 버드나무처럼 내 것에 언뜻언뜻 스치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도 애써 거두지 않았다. 서로는 촉감을 느꼈지만 소슬한 바람결에 낭창거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몸을 들썩일 때마다 그녀의 깊은 고동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고, 내 안에서 일어난 파동과 부딪쳐 철썩였다. 이윽고 두 어깨가 조심스레 포개어 덮자 물결은 서로를 끌어안곤, 은하수처럼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밤하늘을 톡 쏘는 불꽃놀이와 섬광이 쏟아진 두 눈을 바라보며 의식이 몽롱해지기에 이르렀다. 시간이 바닥에 쏟아졌고 버스와 노면 열차까지 끊겼지만, 우리는 총총한 별들의 운행처럼 기꺼이 밤공기를 가로질러 사뿐히 걸었다.


 귀국일이 되었고 비행기는 뜨겁게 달아오른 활주로에 미끄러졌다. 인천공항은 빼곡한 발걸음과 항적운처럼 공기를 가르는 여행 가방이 각국의 공기를 묻혀왔다. 그것에는 채 꺼지지 않은 추억과 기억, 여타 감정도 서려 있을 터이다. 더러 여행 가방을 열 때면 사그라들지 않은 에너지가 공기 중에 확산되는 것처럼. 또는 주머니 속 버석한 모래에서 파도 냄새가 풍기는 것처럼. 나도 조밀한 추억을 기다란 공항 통로에 흩뿌리며 친구들과 작별을 고했다. 인파를 헤집고 빠져나올 때였다. 그녀가 황급히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곤 둘만의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고, 며칠 후의 만남을 기약했다. 재회한 날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날 입국 심사대에서 덮은 것은 여권이 아니라, 우리의 동화책이었을까. 추측만 무성한 마지막 장 이후의 현실 속으로 연착륙한 것이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직장을 가졌고, 나는 편입을 준비하며 각기 다른 세상을 살았다. 서로에게 오롯이 물들지 못하고, 과로가 볏단처럼 야적되고 있음을 서서히 깨달았다. 아무리 바빠도 연애는 가능하다는 항설은, 여유 있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면, 탈진해 퍼더앉은 경주마처럼 갓길에 차를 세우고 혼곤한 잠을 청했다. 마음속 애정을 덜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영혼이 양각으로 도드라지면 기꺼이 내 것을 음각으로 후벼 팠고, 둘을 아물리기 위해 노력했다. 한여름 밤 맞닿았던 우리의 어깨처럼. 하지만 공항에서 그녀의 시선을 따돌렸다면, 그날 밤은 아름다운 환상으로 남았을까. 우리는 구름처럼 몽실한 추억 위에 현실의 벽돌을 쌓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함구할 뿐이었다. 둑처럼 틀어막은 입술이 터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뭉근한 화롯불도 꺼지기 마련이듯, 한여름 밤에 쏘아 올린 마력도 불꽃놀이처럼 기력을 다한 것이다.


 각자의 재생이 정점에 이를 무렵. 그녀가 생경한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눈발이 심하니 조심하라'고 운을 뗐다. 나는 자유로의 선상을 깨고 나와, 파주 근처 어딘가를 향해 차를 채찍질했다. 핸들을 좌우로 급하게, 페달은 강약으로 완급 조절했고, 다시는 찾아올 수 없는 길을 개미처럼 파고들었다. 세찬 눈발에 스적이는 어느 갈대숲에 이르렀으며, 개미 방처럼 둥근 공터에 흥분한 차를 세웠다. 중앙에는 카페 하나가 돌부리처럼 고적하게 솟아 있었다.


 외관과는 달리, 실내엔 조용한 뉴에이지 음악이 흐르고 훗훗한 온기가 옷자락에 버짐처럼 핀 눈꽃을 녹였다. 카운터의 점원이 엿들을 수 없는 자리, 그리고 손님이라곤 우리뿐인 이곳은 이별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언젠가 이날을 떠올린다면, 분명 '영화 같은 이별이었지'라고 말할 수 있을 법했다. 테이블에는 따뜻한 커피 두 잔이 놓였다. 마주 보는 머그컵의 어색함, 그 생경함은 네모난 창밖 낯선 풍경처럼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느리게 맴도는 혼탁한 커피의 보폭에 맞춰 분침도 느슨하게 궤도를 돌았다. 조용히 할 말을 정리하는데, 부서진 입술에선 "오늘 춥지?"나 "손 좀 씻고 올게"와 같은 말이 튀어나오는지. 또 왜 그리 명랑한 음성인지. 내 입술을 동여매고 싶었다. 결국 두 번째 정적을 깬 것도 그녀였고, 덕분에 각자 준비한 말을 간략히 전했다. 그동안 터널 끝 환하게 쏟아지는 빛에 눈이 멀까 두려워, 우리는 이별을 밀어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이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각종 남루한 허울을 뒤집어쓴 채, 서로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돌아 나오는 길. 갈대는 여전히 낭창낭창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계절이 지나면 기억은 갈대처럼 쓰러질 터이다. 그 자리엔 어김없이 연둣빛 조밀한 머리가 쪼뼛이 돋아날 것이다. 그때쯤 되면 북풍이 도려낸 환부도 아물겠지. 나도 그리고 부디 그녀도. 우리는 무한하지만 무한하지 않은 자유로를 빠져나오며,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글과 함께한 음악♪ (가수-음악)

* 지코(ZICO) - 사랑이었다 (Feat. 루나 of f(x))
* 사진정보: 자유로, 파주 및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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