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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Jul 02. 2016

오후의 홍차 음료 말고 쿠키

고적했던 일본 도쿄와 그녀



무탈한 대자연 앞에서
나는 한 줌의 먼지만큼 수축했다


 항공기가 고도를 낮추면서 희뿌연 구름의 몸통을 통과했다. 아래에서 그리고 가까이서 올려다본 구름자락은 거대한 어류처럼 꿈틀거렸다. 구름 하나하나는 비늘 같지만, 다소 뜨임새가 성글었다. 버그러진 틈새로 옅은 빛이 배어나올 만큼. 비행기가 서서히 선회하자 빼곡한 가옥이 마작 판처럼 펼쳐졌다.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기체가 지상과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팽창했지만, 나는 한 줌의 먼지만큼 수축하는 느낌. 당장이라도 함몰될지 모를 공허함. 무탈하기만 한 대자연에 압도된 눈시울은 뜨거워지더니 이내 금이 갔다.


 기내에 좌석 벨트 경고등이 들어오고 기장의 말이 이어졌다. 곧 나리타 공항에 착륙한다는 것과 현지의 날씨 등 상투적인 내용이었다. 어느새 9월 초순이지만, 아직 가을은 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계절도 당분간 바뀌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당시의 나는 첫 직장에서 수습 기간을 마쳤지만, 정규직 전환을 거절했다. 애초에 수습 기간이라는 것도 회사에서 임금을 꿍쳐 둔 채 슬몃슬몃 줄이려는 제방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회사를 훌렁 벗을 수 있었으니, 내게도 편익이 된 셈이다. 그게 내 세계의 자전이 멈춘 이유였다. 창가에는 나의 결정을 만류하던 팀장님과, 반대로 더 많은 기회를 쫓으라던 선배. 그들의 얼굴이 설핏 어리다가, 맹렬한 기세로 밀려온 태양에 쓸려 하얗게 부서졌다. 만일 토닥토닥 토다다닥 빗방울이라도 날개를 토닥였다면, 참았던 눈물은 차치하고 얕은 탄식이 흘러나왔으리라. 어쩌면 너무 높이 날고자 했던 내 욕망이, 이카로스의 날개는 아니었을까. 기울어지는 날개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밤을 은성하게 수놓는 걸음걸이
그리고 중첩되는 향수


 숙소는 도쿄 중심부. 고쿄(皇居)라는 일왕의 왕궁 근처로 잡았다. 단지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딘가 밉살스럽고 한편으론 얄팍해진 내 그림자를 따돌리기 위해 바다를 건넜을 뿐. 딱히 정해둔 행선지도 없었다. 막연히 사색에 머리를 담근 채, 누군가의 함성이 수면에서 휘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거로 족했다. 휴대 전화 로밍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어차피 단절할 바엔 내심 개미처럼 골목을 헤집다가 길을 잃기를 바랐다. 더 이상 갈피를 못 잡고 헤맬 것이 내게 남았을까. 행여 개미지옥에 빠져 허우적대진 않겠지, 싶었다.


 현지 날씨는 예상보다 선선했다. 굽어버린 세월의 등을 쓸어내린 소나기 때문인지. 초목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표정까지 한결 차분해 보였다. 간혹 구름 틈새로 태양이 눈을 치켜뜨는 오후. 훗훗대는 열기가 솜털에 하얗게 맺혔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총총걸음으로 어스레한 거리를 붓질하는 전통의상에 넋을 잃어서였다. 도심의 밤을 은성하게 수놓는 기모노는 마음을 미묘하게 휘젓는 데가 있었다. 오래전에 보거나 스치던 일상인데도 그랬다. 한 소녀의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불꽃을 봤을 때, 비로소 내면에 일렁거리던 아지랑이가 또렷해졌다. 소위 문명이라는 것과 전통의 중첩. 낭인(浪人)처럼 떠돌다가 돌아온 나와, 일본 생활에 대한 향수(鄕愁)가 겹쳐 보여 그랬는지도 모른다.



달빛에 이끌린 듯
조수 간만의 차가 생겼다


 낮에는 선불교에 입각해 조성된 정원이나 아사쿠사 신사를 거닐고, 저잣거리 카페에서 쉬는 게 고작이었다. 밤이면 침대에 누운 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순위 프로를 망연히 쳐다보거나, '헤에-'하고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는 방청객들의 목소리. 또는 처연하기만 한 엔카(演歌)를 듣곤 했다. 무엇보다 식탐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이미 부풀 대로 부푼 가슴을 아랑곳 않고 탐식하는 닭처럼. 저녁을 막 먹고도 골목 모퉁이를 돌면 회전 초밥집에 들어가는 식이었다. 방에서도 늘 무언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거나, 질겅질겅 씹곤 했다. 여행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평소 입이 짧은 나를 생각하면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숙소의 접근성 덕분에 오후에는 잠깐씩 쉬러 들어가곤 했다. 그리곤 그렇게 붙박인 채, 허연 배춧속을 채우는 것과 유사한 행위를 반복했다. 휴대 전화도 때를 놓치지 않고, 메시지를 들이마셔 속이 옹골지게 차올랐다. 따돌리고자 했던 것들이 용케 날아와선, 손바닥 크기의 활주로에 착륙한 것이다. 유일하게 방에선 무선 인터넷이 가능해서였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 사이로 한 사람의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 협력사의 직원으로, 나처럼 신입 사원이었다. 하루는 사내 서버 문제로, 몇 시간 동안 인터넷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녀에게 오전 중으로 보내야 하는 파일이 있어, 개인 휴대 전화로 전송한 게 계기였다. 서로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제법 친해졌다. 내가 두어 달 앞서 입사했다는 것과, 둘 다 수습 기간만 채울 거라는 공통점. 또한 그녀도 루시아(심규선)의 팬이라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새 몇 번이나 만나기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의 메시지가 막 내려앉은 거였다. 둘 다 회사를 막 그만두어서, 엇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흉금을 털어놓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 때문일 터이다. 그녀는 호기심을 나비치며 여행과 관련해서 묻기 시작했다. 내가 찍은 사진들까지 그녀에게는 신기하게 보이는 듯했다. 대화는 천진난만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리고 주제는 디저트에 이르렀다. 일본엔 편의점에조차 맛있는 것이 많다는 것쯤은 그녀도 아는 듯했다. 나는 「오후의 홍차 음료 말고 쿠키」를 찾는 중이라 했고, 제품명이 섬세하면서도 예쁘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것은 그녀가 알기 쉽도록 풀어서 말한 거였다. 국내에서도 오후의 홍차는 '음료'로 제법 알려져 있지만, '쿠키'는 그렇지 않아서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달빛처럼 찰랑거렸을 '그 명칭'이 괜스레 마음에 들었다. 달에 이끌리는 바닷물처럼, 내 마음 한구석에 조수 간만의 차가 생겼다.


 「오후의 홍차 쿠키」는 유학 시절에 좋아하던 것으로, 은연중에 찾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라는 다소 거창한 간판을 내걸라고 한다면, 이것과 아귀가 맞을 터이다. 숙소 근처의 편의점을 두루 돌았고, 번화가에선 백화점부터 100엔 숍까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눈에 띠지 않았다.



심장은 꽃망울처럼
터질 듯이 부풀었다


 귀국을 하루 앞둔 늦은 밤. 대로변에 자리 잡은 상점이 유독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2층짜리 건물은 크진 않았지만, 깔끔하고 소위 프리미엄 마트라는 인상을 풍겼다. 어쩌면 구할 수도 있다는 희망에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제과 진열대를 정리 중인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저기요, 실례합니다만.'이라 말했더니, 불시에 당황한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두 손을 쭈뼛거리고 안경 너머의 시선이 진동계만큼 흔들렸다. 내 의중은 물론, 미세한 떨림마저 측정하려는 것 같았다. '그것'의 소재를 물어보자 그제야 고삐 풀린 표정을 단단히 묶는 거였다. 그리곤 침착한 목소리로 어떤 제품인지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판매 중단되었다고 덧붙였다. 추억의 기폭제를 상실한 느낌이 알싸하게 번졌다. 속절없음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쉽지만 떠나려던 참에, 그녀는 몇 마디를 내게 건넸다. 일본어를 언제 배웠는지, 어디에서 거주했는지, 이번 여행은 어떤지 등. 손님이 뜸한 시간이라 그런지, 아니면 혼자 일하는 것에 익숙해서인지. 그녀는 말을 잃어버린 순박한 사람이 대화의 재미를 되찾은 듯했고,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 어린 눈빛이 떠올랐다. 우리는 새하얀 형광등 아래 고독과 침묵이 자유롭게 오가는 통로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서 바스락거렸다. 떠날 시간이 되어, 친절했던 그녀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에서도, 그리고 무엇으로도 살 수 없을 터이다.


 나는 추억이라는 허상을 쫓은 것인지 모른다. 분명 추락하고 만 시간의 본질에는 가닿지 못할 터이다. 그러나 뱃속이 어쩐지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던 허기를 달랜 것은 무엇일까. 문득 그 점원의 마음 씀씀이가 북받치듯 가슴에 차올랐다. 이윽고 부유하던 상념들이 점철된 장소는 하나의 지점. 내 입이었다. 며칠에 걸쳐 입속을 채우던 행위는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던 것일 성싶다. 대화의 기능을 상실한 입이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곤 탐식뿐이었다. 그리고 점원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 기능을 되찾은 거라 생각하고 싶다. 지금은 그렇게 단정 짓고, 추억을 덮고자 한다. 고독을 찾겠다는 여행은, 도리어 누군가가 내게 찾아와주길 은연중에 바란 것이리라. 그리고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나는 고적한 섬을 떠나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는 정념에 사로잡혔다. 바다 너머에서 아련한 신호을 보내는 그녀를. 꽃망울처럼 작았던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가까운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담담한 구름이나 그 주름을 닮은 머리는 알 수 없지만, 가슴은 알고 있다. 재촉하는 맥박의 흐름을 따라, 계절은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글과 함께한 음악♪ (음악가-곡)

* Mary Chapin Carpenter - 10,000 Miles
* 사진정보: 일본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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