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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Sep 11. 2016

어그러진 말, 감정, 신호


늦여름과 초가을의
어그러진 틈새에 어울릴 법한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이야기. 아침. 휴대 전화가 화장실 타일에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텅’이나 ‘탁’, 그렇다고 얄팍한 ‘틱’도 아닌, 하물며 ‘툭’이라고도 할 수 없는. 활자로 담기엔 역부족인 단말마의 비명. 늦여름과 초가을의 어그러진 틈새에 어울릴 법한, 그런 탄식을.


 나동그라진 기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왜 단숨에 잘려나간 통나무를 떠올렸을까. 내가 직접 목도한 기억의 일부인지, 아니면 어떤 영상을 끌어다가 멋대로 왜곡한 것인지도 모를 장면을.


 내가 그것을 찬찬히 뒤집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무채색의 전자파가 차분한 너울을 일으키며 울근불근 굼닐고 있을 뿐. 산산이 깨진 파도의 포말처럼 반뜩이면서, 자꾸만 무언가를 밀어내는 모양새였다. 기능을 상실한 기기를 강제로 종료 시키자, 남아있던 온기도 차츰 사위었다. 기계에도 기(氣)라는 게 있어, 방금 그게 빠져나간 건지. 금세 목석만치 뭉툭한 느낌. 얼추 4년 가까이 함께한 시간은 개의치 않다는 양, 캄캄한 화면은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염두에 없던 상황이 들이닥치자, 속절없음을 느꼈다.



신속한 그러나 군더더기 없는 이별이었다


 나는 그 즉시 대리점에 갔다. 주말의 매장은 한산했다. 이제 막 문을 열었는지 희뿌연 형광등이 조금 어둡게 느껴졌고, 직원들의 움직임은 다소 분주했다. 바빠 보이는 와중에도, 한 직원이 자리를 잡고 나를 상대해 주었다. 처리는 신속하고 간단했다. 요절난 기계에 대해 애도할 겨를조차 없이, 새 기계와 관련해서는 개통까지 끝났다. 그저 앙증맞은 칩만 새 기기에 옮기고, 서류마다 서명에 서명, 거듭 서명. 그리곤 제품의 하자 여부만 확인하면 됐다. 마지막으로 직원의 손이 자판 위에서 율동을 즐기는 동안, 창구 너머와 나 사이에는 간간이 고요가 흘렀다. 시간이 조금 늘어지면서 드센 태양이 동실동실 떠올랐다. 바닥에 사선으로 꽂히던 빛살도 차츰 누그러지며 그림자에게 밀려났다. 그러는 동안 못 쓰게 된 액정을 문지르면서, 내 가슴속 근심까지 함께 어루만졌다. 몇 가지 형태로 된 기록물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사진, 연락처, 메시지 등. 마침 직원의 손가락이 산뜻한 마침음을 울리며, 나를 부르는 통에 어지러운 의식으로부터 벗어났다. 사진이나 연락처는 별다른 수고 없이 인터넷 환경 하에서 옮겨졌다. 신속한 그러나 군더더기 없는 이별이었다.


 새 단말기는 금방 손에 익었다. 동일한 사용 환경과 유사한 폴더 배치. 달라진 것이라곤 한 손에 들어오지 않는 너비와 조금 둔중해진 무게 정도였다. 오히려 며칠 만에 움켜쥔 기존의 기기가 다소 헐겁다거나, 헛도는 느낌을 받았다. 공(空) 기계는, 온기가 빠져나간 공동(空洞). 문자 그대로 텅 빈 굴이 되고 만 셈이다. 무참히도 무용이 된 기기를 다시 꺼내 든 것은, 한 가지 볼 일이 남아서였다.



붉은 장미가 멍울져 부풀었지만


 나는 오직 공 기계에만 깃든, '한 사람'과 나누던 메시지를 되찾길 바랐다. 특별한 내용이나, 어떠한 기약도, 심지어 상기할 사항도 없는 대화를. 누군가에겐 시답잖을 이야기를. 하지만 내 감각과 이성, 의지를 막론하고 나를 구성하는 각각의 영주들이 한뜻으로 원하는 활자를 말이다. 만일 복원이 불가능할 시, 켜켜이 쌓인 내 무의식이 거꾸로 역류할 수도 있는 문자를 찾기 위해, 공 기계를 노트북에 연결하고 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방금 전까지 붉은 장미가 멍울져 부풀었지만, 낙심하는 순간 꽃과 함께 돋아난 가시가 나의 심장을 저미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끊어진 대화쯤은 새로운 대화로 포개어 덮을 수 있지만, 그 '한 사람'의 경우는 달랐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맞물리지 않는 관계만치 어그러진 터라, 연락조차 취할 수 없었다. 오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돈독했던 것도 아니며, 애초부터 점착성 또한 약했던 사이였다.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 통계적으로 인구가 60억 명이라면, 내 관념적으로는 '한 사람'을 제하고 59억 9,999만 9,999명이 살고 있는 세상. 종교가 없는 사람조차 성모 마리아 상 앞이나, 부처의 다감한 눈매에 감동을 받듯이 '한 사람'은 내 마음속 관념적인 존재로서 남은 듯싶다. 어쩌면 허깨비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애써 부정한 채 쫓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혹시 기계를 고치지 않고 메시지만 복구할 수 있는지, 우회로를 찾아본 바. 꽤나 큰 비용을 요구됐고 확실히 복구된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대개 불륜 문제로 요청하는 듯싶었지만, 알게 모르게 나 같은 부류도 많은 듯했다. 그러니까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말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사설 수리 기관을 방문했다. 전문가는 나사를 풀고 덮개를 열어보더니, 고칠 수 있겠다는 환한 대답을 줬다. 뒤이어 새 단말기를 두고 수리할 필요가 있겠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운동할 때 노래나 들을 거라 했다. 나의 대답에 거짓은 없었고, 굳이 진실할 필요도 없었다. 얼추 15분도 채 되지 않아, 공 기계는 복구되었다. 전원을 켜자 잠금 화면에 두 명의 아이가 호롱불을 든 채 가만히 응시하는 그림이 떴다. 화가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호롱불이 아이들의 새하얀 옷을 불그레하게 물들이듯, 내 마음도 환하게 달떴다.


 다행히 메시지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겨우내 차가운 얼음덩어리 속 서린 나비처럼, 파르르 떨리는 미동도 하나 없이. 어쩌면 출렁이는 전파를 타고 캄캄한 우주를 유랑했거나, 혹은 새벽녘 산사에 들러 먹먹한 타종 소리를 듣고 온 걸지도 모르는. 휑뎅그렁한 공 기계와 소도록하게 쌓인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왜 또다시 다른 것도 아닌, 단숨에 잘려나간 통나무를 떠올렸을까. 그 '한 사람'과의 옹이 하나 남기지 않은, 말끔한 단절 때문은 아니었을까. 얼마간의 시간이 단숨에 잘려나갔기 때문에, 상처며 기억할 것조차 없다는 게 지독한 상처였음을.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한 내 세상에는 감정의 진폭만 커진다. 그런 것들이 자생한다. 이를테면 현악기의 팽팽한 현(絃)과 애처롭게 줄타기하는 활. 뇌의 표면 주름을 닮은 초겨울의 질퍽한 구름. 반뜩반뜩 스쳐 지나가는 전조등과 이어지는 빛의 꼬리. 무채색의 외투를 여미고 몰개성적인 표정을 짓는 사람. 애환을 털어낸 나목들. 늦여름과 초가을의 어그러진 틈새에 어울릴 법한, 그런 탄식이.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한동안 지속될 이야기.


* 그림: John Singer Sargent - Carnation, Lily, Lily, Rose
* 글의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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