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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Dec 18. 2021

우정편지] 마롱에게 물속깊이

- 여덟번째 편지 : 김연수님이 우리 편지 우리 편지를 읽어주실 지도요.

겨울다운 겨울이 오려나 봅니다. 날씨가 제법 매워졌어요, 마롱님. 소설小雪 지나 대설大雪을 향해가는 시절답네요.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요즘이라 어김없는 계절의 변화가 새삼 고맙습니다. 


이번 편지는 사모해마지않는 김연수 작가님 특집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주에 드디어! 작가님을 뵙고 왔거든요. 마롱님께서도 작가님을 ‘사모하기로 딱 정했’다 하셨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무려 2년 만이었어요. 문래동 작은 서점에서 작가님과 내년에 또 만나요, 싱긋 웃으며 인사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만나지 못할 줄은 몰랐어요. 하긴,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보고 싶을 때 만나고, 깔깔 웃으며 차 한잔 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워질 줄을요. 늘어나는 확진자 수가 걱정됐지만 더 미루다가는 또 2년이 훌쩍 지날 것 같아 용기를 냈어요. 뵙고 나서 든 생각은, 사실 생각할 것도 없지만, 용기 내길 잘했다 였습니다. 


회색 털모자를 쓴 귀여운! 모습으로 등장하신 작가님은,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수줍은 미소를 뽐내시며 머리를 긁적이셨어요. 아침부터 모이셨는데 별거 없다고, 둘러앉으면 좋을텐데 아쉽다며, 작가님은 낭독을 시작하셨습니다. 여러 번 읽어 익숙한 <청춘의 문장들> 속 한 페이지에서 시작된 낭독은 이야기 속 올드팝으로 이어졌고 음악이 잦아들면 다음 소설로, 다른 목소리로, 결국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졌어요. 토요일 오전, 일산의 한 서점에 모여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스무 명 남짓한 얼굴들. 마스크로 가려졌지만, 아마도 모두 웃고 있었을 테지요. 아직 발표되지 않은 단편을 먼저 듣는 호사도 물론 좋았지만, 낯선 얼굴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라 좋았습니다. 둘러앉지는 못해도 마음으로 둥글게 이어진다는 걸 아니까요. 작가님도 분명 같은 마음이셨을 거예요.


언제나 좋은 작가님 말씀이지만, 가장 좋았던 건 가파도에서의 이야기였습니다. 작가님은 석 달째 가파도에 머물고 계신다고 해요.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에서 자의로 고립되어 창작 활동을 하려 했는데(우리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죠) 실상은 자연 관찰자라고 하셨습니다. 섬이 너무 아름다워 도저히 안에만 있을 수 없다면서요(주로 레지던스 옥상에 출몰하신다는 후문입니다). 바람 많은 가파도에서 멀리 보이는 한라산에, 환한 달에, 웬만하면 만날 수 있는 일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작가님을 그려봤어요. 정확히는,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을 어떤 이야기들을요. 


작가님은 동풍 부는 언덕에 서 있던 이야기도 해주셨어요.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몸이 뒤로 밀릴 정도였는데, 신기하게 넘어지지는 않았다고요. 문득, 작고 가벼운 새들은 어떻게 바람을 견딜까 싶어 그길로 옥상에 올라 바라본 새 이야기를 이어가셨습니다. 바람에 밀리고 밀리면서도 어쨌든 가고자 하는 쪽으로 바람을 타는 새들을 보면서 우리 사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새의 궤적 자체가 나아가려는 것과 실제 나아가는 것의 중간이구나 싶으셨다고요. 그러면서 작가님은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탄식하셨어요. 와하하. 마스크 속으로 모두 웃게 만들어 놓고는 슬그머니 방향 이야기를 꺼내시는 작가님. 새는 여기에서 저기로 직선으로 가려 했겠지만 바람이 세서 그렇게는 안 된다면서, 그래도 새는 간다고, 우리도 그러자고 하셨어요. 그때그때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에 맞춰 적게 불면 좀 더 나아가고 너무 셀 것 같으면 피하면서요. 어차피 계획대로 안 되는 인생이니까요. 계획은 대충하되 방향은 잃지 말자고,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어쨌든 이루어질 거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와하하 함께 웃고 나서 지금 나는 거센 동풍 속에 있나 보다, 생각하기로 했어요. 휘청이면서도 어쩐지 안심이 됐습니다.


얘기가 너무 길어졌죠? 거의 다 왔어요, 마롱님. 중요한 이야기가 남았답니다.


행사는 자연스레 사인받는 시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작가님과 직접 얘기할 수 있는 이런 시간에는 보통 정신줄을 놓는데요. 이번에도 역시 비슷한 상태여서 그랬는지 저는, 뜬금없는 고백을 합니다.


“서점 리스본 아세요? 저, 브런치에 편지 쓰고 있어요.”


작가님의 동그란 눈이 땡그래졌어요.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싶었지만 주절주절 타임은 이어집니다. 서점 리스본에서 글쓰기 모임을 하는데요(주절주절), 두 명이 편지를 주고받아요(어쩌고저쩌고), 읽어주세요!


마스크를 쓴 데다 횡설수설하느라 잘 전해졌는지는 자신 없지만, 다정한 작가님은 그러겠다며 웃으셨어요. 마롱님, 어쩌면 작가님이 우리 편지를 읽으실지도 몰라요(세상에!). 저는 왜 편지 얘기를 꺼냈을까요. 사실, 마롱님이 떠올랐거든요. 멀리 지귀도에 눈을 주며 ‘순하게 살다 가볍게 죽어야겠네’ 생각하셨다는 편지가요. 이곳에 함께 왔으면 참 좋았겠다 싶은 마음이 내내, 있었습니다. 이렇게 또 고백을 하네요. 알고 보면 저는 고백의 선수인가 봅니다.


제 이름을 슥슥 적어주시는, 건강하게 그을린 작가님의 손을 보며 생각했어요. 좋은 글을 쓰는 손이구나, 하고요. 가파도에서의 달 밝은 밤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기어이 바람을 타던 새는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까요. 올해 출간되는 줄 알았던 작가님의 단편은 내년에 나온다고 합니다(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네요). 아쉽지만, 내년을 기쁘게 기다릴 이유가 생겨 그것대로 좋습니다.


여러 날 쓰지 못했던 글을 작가님을 만나고 와서 썼습니다. 바람이 잠잠해진 걸까요. 그렇다면 어떤 궤적을 남겼을까요. 설렌다는 말을 쓸 일이 별로 없었는데, 조금 설레기도 합니다. 이 마음을 마롱님께도 전하고 싶었어요. 부디, 미풍처럼 기분 좋게 가닿기를 바랍니다.


2021년 11월 28일, 물속깊이 드려요


덧) 김연수 작가님과 황정은 작가님의 책이 나란히 꽂혀있다는 천국 같은 제주의 그곳에서, 우연히 만날 날을 저도 기다려요. 바람을 잘 타다 보면 문득,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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