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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Dec 25. 2021

우정편지] 물속깊이에게 마롱으로부터

열번째편지 _ 2021.12.24


                        빨간 모자 물속깊이님 


                 ♣♣♣   메리 크리스마스   ♣♣♣  




물속깊이님은 눈을 좋아하시는군요. 지난 월요일 요가 시간에 샘이 눈 오는데 뭐 하셨냐고, 첫사랑은 만나셨냐고 말문을 열자 옆자리 언니는 냉큼 눈 오는 날 나다니다 넘어지면 큰일 난다고 해서 하하하 호호호 웃었습니다. 저는 토요일 눈 내린 밤에 보름달을 구경했어요. 5시 반경에 집 앞에서 쓱쓱 눈을 치우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보름달이 아직 깜깜해지지 않은 하늘에 풍선처럼 있었어요. 뭔가 영화 속 같은 게 살짝 신비스럽기도 했답니다. 분명 눈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며칠 전에는 한강에 다녀왔습니다. 삼천리 아파트를 지나 염창나들목 입구에서 다음에는 카페 비에이를 들리기로 했어요. 물속깊이님은 가 보셨나요. 지난가을에는 야외 테이블이 좋아 보였는데, 그날은 카페 바깥에 세워둔 진갈색 브롬톤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강바람을 쐬거나 오리 구경을 하고 나서 또는 눈이 내려 조용한 공기 속에서 마시는 카푸치노라니, 상상만으로도 좋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빨간 모자 물속깊이님을 만날 수 있으려나요. 흐린 날씨에 풍경도 흐렸는데, 오리는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처럼 물결을 타고 있었어요. 어떤 오리는 여럿이 있고, 어떤 오리는 혼자 있고. 무슨 까닭인가 잠시 갸우뚱했더랍니다. 집에 올 때는 안양천을 지나왔어요. 안양천 오리는 구명조끼를 입은 듯 여유만만. 오리는 수영도 하고 날 수도 있으니 입맛대로 강이든 호수든 천이든 뽈뽈 쏘다니겠지만, 어떤 기준으로 살 곳을 정하는지 문득 궁금했습니다. 취향, 수영 능력, 먹이가 많고 적음, 익숙한 곳까지 생각하다가 너무 뻔해서 웃고 말았답니다. 



카페와 서퍼 생각하다가 카페 살레도 번뜩했어요. 살레는 우도 하고수동 해수욕장 앞에 있는 작은 카페랍니다. 일 층에서 주문하고 이 층에 올라가면 옥색 바다를 모두 차지할 수 있어요. 바람이 잠잠한 날이면 창문은 활짝 열어놓고 책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다만 보곤 했는데, 바다를 독차지하고 싶어서 오픈 시간에 맞춰 자전거를 타던 생각도 납니다.   


이런이런, 책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 자꾸 다른 말만 하고 있네요. 


편지에 적어주신 글 서너 번 읽었습니다. 저도 포스트잇을 붙인 글인데, 물속깊이님이 적어주신 글은 또 새삼스럽네요.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최승자)는 많이 버거운 책이었어요. 글에 제 마음이 베일까 봐 저절로 몸을 사렸다고 할까요. 아무튼, 1부와 2부를 읽고 내달려 읽을 수 없어서 쉬는 중입니다. 이런 책은 함께 읽는 일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숙제라서 다행이라는 것을 지난 수요일 줌에서 확인했죠. 


이번 주에는 <기러기>와 <날마다 만우절>과 <밤은 노래한다>도 읽고 있습니다. 어때요. 이만하면 베스트 라인업 아닌가요(으쓱으쓱). 모두 좋지만, <밤은 노래한다>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쪽수가 저절로 넘어가듯 재미있어도 이야기에 홀리지 않으려 천천히 읽고 있어요. <내가 아이였을 때>보다는 모르는 말이 적어서 사전 검색하느라 지체되는 시간은 줄었습니다. 오늘 만난 말은, 리스본 연필을 꽂아둔 데를 펼치니 “이따금 들리는 영각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봐 인근에는 집이 없는 듯 보였다.”에서 영각에 밑줄을 쳐놓았네요. 중국 용정, 1930년대, 힌트 두 개를 가지고 아무리 궁리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사전을 찾았더니, 예문은 ‘송아지가 강변에서 풀을 뜯어 먹다 말고 영각하는 소리가 들린다.’입니다. 그리고 ‘식소사번’과 ‘수즉다욕’을 찾고는 김연수 작가님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말을 알고 계신지,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다독 외에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걸까요. 물속깊이님은 알고 있을 것 같아 여쭙니다.  


여기까지 써놓고 스트레칭 하면서 글쓰기 클럽 문우님이 올려주신 ‘소설가 김연수의 서재’ 동영상을 보고 왔어요. ‘조금씩 고쳐 쓰는 즐거움’과 ‘조금씩 나아지는 즐거움’ 덕분에 ‘소설을 계속 쓴’다는 말씀에 왕별 스티커를 10개 붙이고 싶습니다. 


허허허,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제가 원래는 말이 없는 편이라고 하면 믿으실까요. 


내일은 크리스마스! 아직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트리도 구경 못했지만, 올해는 그런 걸 투덜거릴 형편은 아니니까 딸기를 먹으며 서점님이 알려주신 영화 <블라인드>를 보고 글쓰기는 대충 할까 봐요. 물속깊이님은 계획이 있나요. 새뜻한 게 있으면 귀띔 부탁드립니다. 


물속깊이님, 동지(冬至) 지났다고 내일부터는 동장군(冬將軍)이 온다니 채비 단단히 하셔요. 저도 그럴게요. 2021년 12월 24일. 온기 부자 마롱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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