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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터 Oct 28. 2020

거울로 만든 지도

상상해보자. 

여기 거울이 없는 세계가 있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찌 생겼는지 알지 못해.  

그중 하나인 라쥴리는 자신이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며 운동신경도 좋다 믿었지.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생각했어.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무 열매에 손이 닿지 않았던 거야.  

그렇게 여기저기 부딪치고 긁히고 미끄러지다 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어. 

쉽게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일들이 끝도 없이 좌절되자  

쌓이고 쌓인 실패로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내려갔어. 

‘뭐 이런 것도 못하냐.' 

스스로가 마냥 한심스럽고 짜증스러웠지. 

나중에는 실망하는 것도 귀찮아져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땅바닥에 내려놔버렸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기대감이 아주 없어진 탓일까. 

어떤 꼴을 보아도 실망할 것 역시 없어진 거야. 

그리고 그것이 묘한 용기를 불러일으켰지. 


라쥴리는 엉금엉금 기어 근처의 냇가로 향했어. 

마침 날이 고요하고 맑아 물 표면이 잔잔하던 참이었지. 

물 위로 고개를 들이민 라쥴리는 눈을 끔뻑였단다. 

수면 위에 비친 이도 따라 눈을 끔뻑였지. 


“이게 나라고?” 


처음으로 마주한 자신의 모습.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라 어이가 없을 정도였어. 

처음에는 잠시 부정도 해보았어.  

하지만 이내 고개를 주억였지. 

통증이 느껴지는 곳, 그곳에 상처가 보였던 거야.

상처를 따라 시선을 그리니 곧 전체가 눈에 들어왔어. 


투명한 수면에 비친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완벽하지는 않은,  

하지만 자조했던 것만큼 한심하지도 않은,  

그저 상처투성이가 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었어. 


어쩌면 잘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잘 몰랐던 것뿐인지도 모르겠어. 


라쥴리는 그렇게 높은 곳에 팔이 닿는 사람이 아니었어. 

하지만 원한다면 강인한 힘으로 딛고 설 무언가를 끌고 올 수 있었겠지. 

라쥴리는 그렇게 넓게 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어. 

하지만 원한다면 세세한 것들을 기록해 지도를 그릴 수도 있었을 거야. 


바보처럼 계속해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이제 사양이야.

라쥴리는 생각했어. 

그렇게 이상 속의 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 

그것을 찾기 시작했지. 



잘 알아야 잘 쓸 수 있어.

©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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