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 글쓰기 주제 : 직업으로서의 일
사람들은 흔히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다음 단추도 어렵지 않게, 수월하게 꿸 수 있다고.
수월함이 쌓고 쌓이면 금방 능숙 해 질 테니, 처음 그 순간에 온 힘을 다해 집중하라고.
하지만,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 하나도 스스로 컨트롤 못하는 애였다. 내 심장과 맞닿은 책상이 쿵쾅 거리는 심박수에 맞춰 어찌나 요란스럽게 덜컹거리던지. 결과는 뻔했다. 망했다 수능. 재수생이 될 형편도 용기도 없었다. 믿었던 과목에서 괴상한 등급을 받았다. 나 문과생인데 수리영역 등급이 가장 높은 거 실화?!
덕분에 대학교라는 선택 앞에서 첫 단추를 잘 꿰매야 한다는 어떠한 의지도 생각도 없었던 나는, '수능 망치면 집 가까운 데로 가는 게 장땡이야!'라고 했던 어떤 아주머니와 '요즘 대학 나와도 전공 못 살린다는데 거기 나오면 그래도 네 스스로 예쁘게 가꾸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겠니?'라고 했던 우리 엄마 손여사. 이 두 사람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했고, 별생각 없이 대학교를 결정했다. 자의보다 타의가 더 가미되어 나의 첫 단추가 꿰매진 것이다.
그렇게 들어간 뷰티학과에서의 4년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수월하지 못했다. 과학이 싫어서 고등학교 때 문과를 택했던 것도 있었는데, 마사지며 메이크업이며 사람의 몸과 관련된 행위라서 그런지 해부생리학과 피부과학. 심지어 의학용어까지 배웠다. 미용은 해 본 적도 꿈꿔 보지도 않았던 내가 미용가위와 바리깡을 들고 커트와 펌을 배웠다. 두피관리와 전신 마사지를 배웠다. 그래도 이런 일들은 견딜만했다. 대학교 4년 동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바로 미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혹은 고정관념이었다. 믿고 걸러야 될 여자 직업 TOP3에 미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게 온라인 상에서 여기저기 활발하게 나돌아 다니며 갑론을박이 심했던 시기였다. 뼛속까지 미용인이 아니었던 나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이 집단 속에 반만 발을 담근 채 어정쩡하게 졸업을 맞이했다. 조기 취업이었다.
학과 특성상, 미용 중·고등학교 임용시험을 준비했던 동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취준생의 시기 없이 다들 취뽀(=취업뽀개기)에 성공했다. 현장학기제가 있었던 덕분이기도 한데, 나는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두피탈모관리센터에 실습을 나갔다가 2년 5개월 정도 계속 그 직장을 다녔다. 케어리스트(carelist)로서 비듬이나 두피 염증, 탈모 같은 고민들을 갖고 있는 고객들의 모발과 두피를 제품이나 기기로 관리해 주는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실기가 다른 미용 분야보다 적고 반복적이었던 탓에 노력하여 적응을 할 수 있었다. 이론적인 소양이 케어리스트로의 자질로서 중요한 부분인 것도 잘 맞았다. 그렇게 나는 미용 분야에서 그나마 내가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선택 해 사회인으로서 첫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정쩡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두피탈모관리센터를 낯설어했고, 말 주변이 부족했던 나는 항상 내 직업과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자신감이 없었다. '명료하지 못함'의 전제로 내 직업에 대한 불만족과 여전히 변함없었던 미용인에 대한 안 좋은 시선(어쩌면 그때의 내가 스스로 만든 시선이 아닐까 싶네요)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있었다. 박봉과 주 6일제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이직을 했다.
두 번째 직장은 염색약이 주력상품인 헤어 제품사였다. 이 곳에서 나는 홍보마케팅 부서와 영업 관리직을 겸하며 사무직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갑분사(=갑자기 분위기 사무직)로 당황스러우시죠?
사실 학과 생활을 할 때, 화장품 회사에 들어가고는 싶은데, 쭈뼛거리다가 경영학과 복수전공은 놓쳐버리고. '아 나는 스펙도 가망 없고 정보도 없으니 무식하게 하자.' 했던 행동들이 좋은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마케팅 동아리 활동, 개인 블로그 운영, 화장품 서포터즈, 타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했던 대외활동들. 여기에 포토샵 자격증과 만료된 토익점수를 새롭게 갱신하여 함께 더했다. 무엇보다도 사무직에 대한 열망을 해소하고 싶었고, 나의 마음은 통했다. 직업에 대한 나의 자존감 역시 높아졌다. 당연했다. 주 5일제와 조금 나아진 경제적 여유가 주는 달콤함은 인생에 있어서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이때 배웠다.
하지만,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생각보다 빠른 연봉협상과 인상된 급여 폭이 적지 않았지만, 사회초년생과 다름없는 내가 대리급의 업무와 성과를 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날 미치게 만드는 건 CS 응대였다. 일반 소비자부터 시작해서 미용실 원장님, 미용 재료상 사장님 등등등.. 맞지 않는 듯한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성인이 된 어른도 고약하게 땡깡을 부릴 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매일 속이 메슥거렸고 원형탈모가 생겼다. 수화기 너머로 화를 토해낼 수 없는 불리한 위치에 있다 보니, 자꾸자꾸 내면에 화가 쌓였다. 괜히 엄한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뱉으며 날카로워졌다. 사그라들던 미용인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시선이 요동쳤다. '아, 역시.' 보이지 않는 타인들에게 상쳐 받았고, 이 업계를 떠나야지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올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습니다만.
이게 바로 작년 5월의 일입니다.
지금은 어떤 회사를 다니고 있냐고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는 같은 업계에 머물러 있다. 돈이 주는 달콤함을 저버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심층으로 이루어진 1:1 면접에서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내 마음이 움직인 것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제는 홍보마케팅 업무'만' 한다는 것. 전화로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다는 것. 사람에게 상처 받을 일이 적다는 것. 사람들이 점잖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맡은 업무가 좋다는 사실은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가 없다. SNS를 관리하는 일. 글을 쓰고, 그 글을 이미지로 영상으로 재가공하는 일. 온라인 마케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 트렌드를 파악하는 일. 심지어 상사의 보폭에 걸음을 맞추는 일 까지도 지금은 싫은 마음이 들지가 않는다.
이제야 나도 수월 해 지는 건가 싶으면서도 앞으로의 내가 궁금한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미용인 혹은 미용업계 사람들 속에서 나의 역할,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시간으로만 8년이란 시간을 썼다. 사실 앞으로도 이 업계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맞는 걸까. 머무를 수 있을까. 이다음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고민스러운 부분들이 참 많다. 한 분야에 10년 이상 시간을 쏟으면 그 분야에서 만큼은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하던데. 나는 2년 뒤, 어떤 모습일까. 전문가가 되어 있을까?
내가 꿰맨 첫 단추의 행보가 궁금하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