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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혼 Dec 14. 2023

그 정도 했으면 뭐라도 되어있어야 하는 거 아냐?



 늦은 시간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마침 원고 작업을 하고 있던 터라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와 나는 조금 이상한 관계였다. 두 사람 다 말수가 적고 낯가림이 심했던 터라 함께 있어도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그 친구는 피아노를, 나는 책을 읽고 있을 때도 있었다. 주변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너희 둘은 만나면 도대체 무슨 얘길 해?”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면 친구들은 “비슷해서 잘 맞나 보다”하고 그들끼리의 결론에 도달했다. 나와 그 친구의 관계는 그런 형태였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정적 속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었다. 그 친구는 심심할 때면 밤늦게 내게 전화를 걸었다. 웬일이냐고 물으면 “이 시간에 깨어있을 사람이 너밖에 없을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화는 한 시간을 훌쩍 넘어 두 시간, 세 시간까지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동안 무슨 대화를 나누었냐고 묻는다면 꼭 집어 내놓을 에피소드가 없다. 그만큼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떠들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그 친구와 더욱 볼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생일이 되면 어김없이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가끔은 옛날처럼 밤늦은 통화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까, 잊고 있던 그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역시나 밤늦은 시간이었다. 답지 않게 한껏 격양된 목소리가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이따금씩 수선한 웃음소리도 들렸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어김없이 “이 시간에 깨어있을 사람이 너밖에 없을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따라 웃었다. 너도 참 여전하구나.


 우리는 한참 동안 별 볼 일 없는 일들에 대해 떠들었다.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면 다시는 곱씹어지지 않을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던 걸까, 친구는 잠시 동안 뜸 들이는가 싶더니 내게 물었다.      


  “취한 김에 묻는 건데. 아아 그냥, 지금 아니면 물어볼 용기가 안 날 것 같아서. 네가 그린다는 만화 말이야. 도대체 뭘 그리고 있는 거야? 왜 나한텐 한 번도 안보여주냐?”     


 친구가 궁금한 듯, 내심 서운한 듯 말했다.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난처하다.

 보여줄 수는 있는데 아직 정식연재가 되지 않아서, 완결까지 그려놓은 작품이 없어서, 지금까지 딱히 묻지 않길래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못해서...

 답할 수 있는 가짓수는 여러 개였지만 무엇 하나 명확하지 못했다. 지망생 생활이라는 건 명확하지 않은 것들의 연속이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여러 개의 가짓수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나를 친구는 잠자코 기다린다.     


  “만화 그린 지 얼마나 됐지? 예에엣날에도 그리고 있지 않았나?”

  “응, 한 3년? 4년 됐지. 벌써 이렇게 됐네.”

  “그렇구나. 야, 그런데. 그러면. 그 정도 했으면 뭐라도 되어있어야 하는 거 아냐?”     


 악의 없는 의문이 가슴을 찔렀다. 아니, 정말 악의가 없었던 걸까? 그것조차 잘 모르겠다. 술기운을 빌렸다던 친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나로서는 당최 그이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약간의 식은땀을 흘리며, 약간 붉고 뜨거워진 얼굴로, 어떻게 대꾸해야 할까 고민하다, 역시나 바보처럼 웃어넘겼다. 만화가가 뭐 하루아침에 되겠냐고 말이다.     


  “그런가. 그것도 그렇네. 하루아침에 되기 힘들지!”     


 친구는 또 푸스스 웃는다. 우리는 다시 시답잖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통화가 종료되었다. 평소처럼. 이제 그만 들어갈게, 나중에 봐, 응 끊어, 응, 하며.     




 그 친구와 나 사이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우리의 관계는 여전했다. 매일 연락하며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으나 연락을 취하지 않는 상태가 평소의 상태였다. 그러다 누군가의 생일이 되면, 그러다 누구 하나가 심심해지면 전화하는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나는 아니었나 보다. 우리의 사이는 여전하지만 나는 여전하지 못했나 보다. 나는 그날 이후로 두 번 다시 그 친구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친구에게서도 더 이상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여전한 상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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