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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혼 Dec 01. 2023

하늘이 무너저도 솟아날 구멍은 있더라

묵은 때를 털어내야 할 때



 세 번째 회사를 퇴사할 당시 내 우울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직장생활에 치이다 보니 퇴근 후에는 쓰러져 잠들기 바빴고, 졸린 눈을 비비고 겨우 책상 앞에 앉아도 만화 그리기 연습은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돈이라도 쏟아부으면 뭐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거금을 들여 액정 태블릿을 구매했지만 먼지만 뽀얗게 쌓여갈 뿐이었다.

 만화가가 되겠다고 해놓고... 나는 그때까지 콘티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다.


 퇴사를 앞둔 시기엔 스트레스가 심해 정수리가 점점 휑해져 갔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수챗구멍에 막힌 머리칼을 한 움큼씩 끄집어내고 있으면 내 숨까지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 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은 할 여건이 안 되고, 그런데도 포기는 못하겠는 멍청한 상태. 없던 기운을 끌어 모아 그림을 그려도 결과물은 내 기대와 달리 엉망진창인 날들의 연속.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바닥일 때, 사람을 그렇게 무너지더라.     




2012년, 내일로 여행으로 간 통영 풍경



2018년, 퇴사 후 다시 찾은 통영




 결국 내게 필요한 건 약간의 휴식과 재정비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통영으로 떠났다. 20대 초반에 무작정 떠났던 내일로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여행지가 통영이었기 때문이다. 푸른 바다를 둘러싼 정겨운 거리를 걸고 있노라면 ‘이곳에선 없던 영감마저 샘솟겠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쩐지 통영에 다시 간다면 지금의 나도 다 괜찮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여행을 계획하며 게스트하우스를 잡고, 장장 4시간에 걸쳐 통영으로 향하면서도 나는 어김없이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이지? 이뤄놓은 것도 없으면서... 회사 다니면서 정말 만화 그릴 여유가 없었나? 내 의지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내달리는 버스 안에서 한 명의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세웠고, 다른 한 명의 나는 이를 떨쳐내려 애썼다.


 그만해. 그만해. 그럴 때마다 나는 혼잣말하는 버릇이 늘었다.          









 통영에서의 이틀째 하루가 저물어가던 무렵,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한 통 왔다. 정확히는 친구의 친구에게서 온 제안이었다. 웹툰 관련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던 룸메가 링크를 하나 보내줬는데 내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만화 지원사업에 관한 공문이 하나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원사업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나는 지금까지 숱하게 보아온 공모전 포스터의 일종일 것이라 치부하며 친구에게 말했다.


   “이런 것도 뭐 만들어 놓은 게 있어야 신청하는 거지. 나는 원고는커녕 원고 그릴 줄도 모르는데 무슨... 안될 거야.”


 일본 유학에서 얻어온 도전의식은 오래전에 사회에 잡아먹혀 사라지고, 맥없이 앙상한 뼈만 드러낸 답을 뱉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좀 자세히 봐봐. 원고 없이도 신청할 수 있는 거라니까? 교육을 지원해 준다잖아!”


 그 말에 심장 안의 뭔가가 툭, 건드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친구의 조언대로 재차 링크에 접속해 처음부터 끝까지 공문을 꼼꼼히 훑었다. 대략의 내용은 이러했다.


 만화인재 양성을 위해 만화가 지망생과 현역 만화가를 매칭해 멘토링을 해준다, 지원사업 기간 동안 일정 금액을 지원받고 착실히 사업에 참여해 결과물을 만들어 제출하면 된다.


 돈을 주고 교육을 해준다니! 심장 깊숙한 곳에서 발동이 걸린 엔진이 묵은 때를 털어내고 신호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이젠 목구멍을 가득 메운 머리카락 뭉치를 완전히 걷어낼 때였다.          




 신이 난 나는 서울로 돌아가자마자 책상 앞에 앉았다. 지원사업에 제출해야 할 포트폴리오는 총 10장, 그 중 5장은 그동안 그려온 작업물로 채우고 나머지 5장은 지원사업에 신청할 작품에 관한 그림으로 채워야 했다. 나는 양쪽 다 가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신청 기간은 겨우 일주일 남짓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회사에서 디자인직으로 일하며 작업해둔 일러스트 캐릭터나 연습용으로 그려봤던 말도 안 되는 그림들까지 영혼을 끌어 모으듯 추려서 포트폴리오 4장을 만들었다. 나머지 6장은 하루에 한 장씩 캐릭터 하나를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루는 지원서를 작성해 내면 되겠지.

 나는 신청마감을 앞둔 일주일 동안 밤낮없이 그림만 그리며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다. 다 만들어진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면서도 한없이 부족한 느낌이 들어 그동안 나름대로 공부해 왔던 자료들이나 글들을 모아 사진으로 찍어 첨부했다.


 제가 이렇게 간절해요, 제발 알아주세요.


 포트폴리오로 인정되지도 않을 사진자료들을 첨부하면서 이름 모를 심사위원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은 참 좋더라.          




지원사업 포트폴리오에 첨부한 포트폴리오가 되지 못할 자료들




 지원사업 신청을 마치고 결과가 발표되기까지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정확한 발표일자도 지정되어있지 않았다. 연료가 바닥난 엔진은 차갑게 식는 탓일까, 한껏 달아올라 열성이었던 나는 그 기간 동안 짜게 식어 이불속에 파묻혀 지냈다.


 이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침대 밑으로 깊숙이 꺼졌다. 막연히 무서웠던 거다. 막연한 기다림은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으니까. '지원사업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이라는 핑계로 한껏 나태하게 굴면서도 나는 알았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포트폴리오를 냈음에도 선정되지 못하면 많이 실망하리라는 것을. 실망은 늘 기대만큼의 아픔을 동반했다.     


 그렇게 밤낮없이 그림을 그리던 나는 밤낮없이 나태한 일과를 반복했다. 그리고 해가 중천을 향한 지 한참이었던 어느 느지막한 시간, 잠에서 깬 나는 습관처럼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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