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잔고에 찍힌 숫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삼만원, 삼만원, 삼십만원도 아니고 삼만원. 다음 달 월세는커녕 식비로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안 좋은 일은 몰아서 온다더니 하필 그게 나한테 올게 뭐람. 불행은 꼭 빗겨가는 일이 없다.
첫 회사를 그만둔 후 나는 어렵지 않게 이직을 했다. 연봉도 훨씬 많고 업무 경력도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무실 환경은 그다지 쾌적하지 않았지만 이정도만 해도 어디야, 나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입사한지 한 달이 지나도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하루살이 같던 내게 임금체불은 당장의 생계와 직결되어 있었고, 초조한 마음에 이사님을 재촉해봤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거기다 애 딸린 이혼남이라던 팀장은 새벽 3시에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대고, 매 점심시간마다 함께 밥을 먹자며 귀찮게 굴었다. 팀장의 손에 이끌려 마주앉은 식탁에서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어야 할 때면 삼키지도 않은 음식이 그대로 역류해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 때마다 첫 직장에서 대표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같은 애는 나정도 되니까 써주는 거야. 네가 다른데 가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괜히 입술을 꾹 짓이겨본다.
결국 이직한 직장에 출근하는 것을 그만둔 나는 노동청에 신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신고사실을 접한 이사는 곧바로 전화해 호통을 쳤고, 다음날엔 월급을 줄 테니 제발 출근하라고 달랬으며, 그 다음날엔 미안하다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도 노동청에서 제안한 세 번의 출석요구에 불응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고소를 하는 것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노동청을 통해 사업장과 구두로 일을 풀어보고, 그래도 안 될 경우 고소장 접수를 통해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소를 한다고 해도 세 번의 재판을 통해 체불된 임금을 받을 때까지는 일 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었다. 그 사이 몇 번의 서류제출과 출석이 있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돌려받는 금액도 소액으로 분류되어 나라에서 처리해주는 것이라 굳이 돈 몇 푼 받으려 고소까지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며 법원에서 면담을 해주던 직원이 씁쓸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고소하시겠어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갈 때까지 가보자.
고소장을 접수한 후 찾아간 법원의 국선변호사 사무실은 혼잡했다. 담당변호사의 이름이 크게 적힌 사무실에는 감히 들어갈 수조차 없었고, 그 앞으로 상담부스처럼 테이블을 두고 늘어선 직원들을 통해서만 고소절차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하긴, 서울권에서만 해도 이런 일을 당한 청년이 한둘이 아닐 텐데 국선변호사가 느긋하게 나 같은 청년들을 하나하나 만나줄 거란 기대는 참으로 안일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활짝 열린 변호사 사무실 책상에 빼곡히 쌓여있는 서류더미가 갑갑하게 숨을 조이는 것 같았다.
상담을 마친 후 길을 헤매던 나는 생경한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어떤 곳에서는 파산한 사람들이 모종의 서류에 서명을 하자며 불도저처럼 달려들었고, 어떤 곳에서는 사연을 품은 아주머니가 가슴을 내리치며 울고 있었다.
이제 나도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나는 어떻게 해도 이런 풍경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몇 시간을 고민한 끝에 결국 언니에게 연락을 취했다. 회사도 그만뒀고, 고소장도 접수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내 수중에 남은 돈이 삼만원이라는 사실이 변할 리도 없었기 때문에. 언니에게 간략하게나마 상황을 설명하고 생활비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도저히 부모님께 연락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언니는 그날 바로 삼백만원을 입금해줬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집근처에 구인하는 모든 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처음으로 출근하라는 회사에 가서 무조건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세 번째 회사에 입사해 언니에게 빌린 삼백만원을 갚을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운 좋게 괜찮은 직장을 얻게 된 나는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고, 언니의 돈을 갚고 난 후 디지털 작업을 위한 액정 타블렛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당장 통장에 삼만원만 남아있던 시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 저편으로 흐릿해져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에 겪었던 실패의 경험은 여전히 몸 안에 남아 내게 세상을 버텨낼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불교에서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부처라 칭한다고 한다. 나를 괴롭히고 욕하는 사람은 그만큼 나를 성장시키기에, 그런 사람은 부처님이 보내주신 또 다른 부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지 악인의 탈을 쓴 부처님이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실패라는 것이 부처라면, 삼만원으로 얻은 불교식 개오(開悟)가 퍽 못쓸만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건 이후 체불당한 임금을 받기까지 꼬박 십 개월 이상이 걸렸고, 이 일의 원흉인 이사는 오랜 친구라도 되는 마냥 잊을만하면 전화를 걸어 “잘 지내니? 출근해라.” 식의 헛소리를 해댔지만 이마저도 귀엽게 들리기 시작할 때 쯤, 나는 꽤 단단해져 있었기에.
나는 여전히 삼만원, 삼백만원, 세 번째 회사 등등 ‘3’이라는 숫자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지만 위기의 순간에 마음속에 새기는 숫자도 3인 사람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