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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진 Nov 03. 2017

아직 늦지 않았어, 76세에 화가가 된 사연

모지스 할머니의 정겨운 풍경들 

파란 하늘과 뭉개 구름 아래로 펼쳐지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 밀짚모자를 쓰고 우유통을 들고 나온 부부, 물을 긷는 사내 등 제각각 활기찬 아침을 맞는 모습이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시골 마을 출신, 안나 마리 로버트슨 모지스(Anna Mary Robertson Moses)(1860~1961). ‘모지스 할머니(Grandma Moses)’로 더 잘 알려진 미국의 국민 화가다. 사실 모지스 할머니는 평범한 주부로 산 세월이 화가로 불린 나날들보다 훨씬 길다. 이 그림은 모두 76세부터 그린 것이니까 말이다. 




우연히 시작한 그림 

시골 농장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의 취미는 자수였다. 어느 날 관절염 때문에 더 이상 좋아하는 자수를 둘 수 없게 되자, 그녀의 여동생이 상대적으로 쉬운 그림을 제안했다. 눈이 침침한 노인에게 바늘구멍에 실을 끼우고, 온 신경을 집중해 한 땀씩 떠내야 하는 자수보다는 부드러운 물감을 묻힌 붓질이 훨씬 쉬웠을 터였다. 그렇게 모지스는 76세에 처음 붓을 들게 되었다. 그녀의 그림은 동네의 한 약국 유리창에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우연히 이를 본 컬렉터 루이스 칼더(Louis J. Caldor)가 그녀의 그림 10점을 사 가면서 이듬해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1938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알려지지 않은 미국 화가들의 현재>라는 전시에 그녀의 그림이 3점 소개된 것이다. 평화로운 시골 풍경과 마주한 뉴욕 사람들은 첫눈에 마음을 쏙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잠시 잊고 있던 가족, 이웃과의 소중한 추억들이 샘솟듯 피어났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모지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따스한 감성을 사랑했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지스는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여 년간 무려 1,5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은퇴를 해도 늦은 나이에 화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녀의 도전은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인생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요.” 70대 할머니의 작은 체구에서 그토록 에너지가 발산될 수 있었던 건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아침처럼 그녀의 마음 속에 행복이 가득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Quilting Bee 



함께 만드는 축제, 할머니의 따스한 시선

모지스 할머니가 미국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어버이날(Mother’s Day), 지역 축제(Country Fair) 등 모국의 전통 행사를 기록하고 이를 특유의 전원적인 필치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퀼팅 비>도 그중 하나다. 우리가 봄이 되면 모내기나 김매기, 가래질을 품앗이했던 것처럼 미국의 부녀자들은 퀼트로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19세기 미국에서는 섬유 산업의 공업화로 천 생산이 활발했고, 그 덕분에 천 속에 솜을 누비는 퀼트가 대유행이었다. 당시 여성들 사이에서는 마을의 중대한 일이 있을 때 다 함께 퀼트 천을 만들며 협업하는 ‘퀼팅 비(Quilting Bee)’ 모임이 있었다. 부녀자들은 각집에서 가져온 조각 천을 모은 뒤 둘러앉아 바느질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천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유럽에서는 어떤 퀼트 디자인이 유행하는지부터 마을의 누가 결혼하고 약혼하는지까지 마을의 대소사를 나눴다. 그림의 오른쪽 위를 보면 색색의 천을 누비고 있는 여성들이 보인다. 혼자였으면 지루할 법한 바느질도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저절로 속도가 붙고 흥이 났을 것이다. 남편의 자질구레한 흠이나 자녀를 키우면서 생기는 사소한 고민들을 주고받으며 부인들의 유대관계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나 퀼팅 비가 여성들만의 행사는 아니었다. 작업이 끝날 때쯤이면 진짜 파티가 시작된다. 저녁 무렵, 바깥일을 마치고 온 남성들과 아이들이 모임에 합세해 흥겨운 한마당이 벌어졌다. 작업대 아래에 놓인 테이블 주변에서는 식사 준비가 한창인데 하얀 테이블보 위에는 접시와 포크, 나이프가 가지런히 놓였고 빵과 칠면조가 준비되어 있다. 화덕에서는 칠면조가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고, 남자들은 땔감용 나무를 짊어지고 들어섰다. 맛있는 냄새를 맡고 달려온 아이들과 강아지들도 제법 신이 난 모양이다. 뜨개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 곁에 선 소녀는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조르고 있는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은 퀼팅 비를 계기로 인사를 나누고, 서로 근황을 주고받으며 꿀벌처럼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는 것이다.








행복을 그리는 할머니 

그런가 하면 모지스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행사들을 꼼꼼히 기록했다. 다 같이 사과 버터를 만드는 모습, 소박한 야외 결혼식, 칠면조를 잡는 사람들 등 크고 작은 일에 협력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이 그녀의 그림에 생생히 담겼다. 모지스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처음에는 당시 인기 있던 ‘커리어 앤드 아이브스(Currier and Ives)’ 회사의 그림엽서를 베끼면서 그림을 그렸지만 이후 점점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해갔다. 특정한 미술 양식에 영향받지 않고 주관적인 화풍을 만들어낸 점을 들어 미술계 한편에서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나이브 아트(Naive Art)’로 분류하기도 한다. 겨울 풍경을 그린 그림들은 네덜란드 화가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겨울 전경과 몹시 흡사하다. 그런데 정작 모지스는 그의 그림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시간이 나면 나는 창밖의 풍경들을 관찰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눈을 감고 추억들을 떠올리곤 하죠.” 모지스가 영감을 받은 것은 오직 행복했던 농장 생활 그리고 함께 어울리던 이웃과의 추억이었다. 


그녀는 80세에 처음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후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활발하게 전시했다.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사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림들은 엽서, 우표, 기념품 등에 인쇄되어 불티나게 팔렸고, 3~5달러 하던 그림 값은 수천 배 이상 뛰어올랐다. 각종 매체에서는 그녀를 ‘영향력 있는 여성’ 명단에 꾸준히 올렸으며 1960년, 뉴욕 주지사였던 넥슨 록펠러는 그녀의 100번째 생일을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이 되면 사람들은 으레 그녀의 그림을 꺼내 미소 짓곤 한다.


‘행복’을 정의한 기록을 찾아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행복한 삶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했는데 이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사람들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소신을 다하고 어울리며 살아갈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원하는 무언가를 가져야만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란 결국 마음이 편안하고 안녕할 때 찾아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모지스 할머니의 따스한 그림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행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서로 온정을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말이다. 



문화예술매거진 <Trans Trend Magazine>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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