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부터 바빴다. 면접을 봤던 곳에서 합격 안내가 왔고, 하필이면 출근예정일에 건강검진을 예약해둬서 하루 늦게 출근하는 걸로 출근일을 조정했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배탈이 나는 바람에 외출을 취소했다. 처음에는 유당불내증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저녁이 다 되어서야 스트레스로 인한 과민성대장증후군 증상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합격할 것 같았지만 진짜로 합격하니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 같다. 가족들은 거리가 먼 것을 제일 염려했다. 사실 서울에서 출퇴근하던 걸 생각하면 먼 곳은 아니지만, 지방에서 몇 년 동안 생활하다보니 나도 조금만 움직이면 멀다고 생각하게 돼버렸다. 게다가 여기는 지하철도 없다. 나는 장롱면허라서 지금 당장 운전도 할 수 없다. 그러니 가족들이 걱정을 할 수밖에.
하지만 나에게는 이게 문제가 아니다. 난도가 낮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스스로 목줄을 잡고 난도가 높은 일을 하는 곳으로 가버린 것 같았다. 물론 마음은 일단 단기계약자리인데다 이 지역에서 내가 가볼 수 있는 일자리라면 경험을 해두는 것이 좋으니 좋은 기회라고 도닥였지만, 몸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은 모양이다.
합격의 가장 큰 원인은 다른 면접자가 면접에서 유약한 모습을 보였던 게 아니었을까, 라고 마음대로 추측 중이다(남탓 중). 면접 전에 잠깐 대화를 나눌 때 사람은 착해보였는데 자신감이 약간 부족해 보였다. 그러고보면 나는 또 뭐라고 면접에서 그렇게 당당한 걸까. 이런 태도가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는데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안 좋은 소식이 있어."
"취업했어?"
안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조카는 바로 나의 취업을 눈치챘다. 조카에게 안 좋은 일이란 이모가 취업하는 것이다. 요근래 하교 후 조카의 간식(=냉동식품 데워주기)을 챙겨주고 있었는데 취업함으로써 중단하게 됐다. 어차피 1월부터는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으니 그 시기가 아주 조금 빨라졌을 뿐이다.
길이 정해졌으니 묵묵히 걸어보려 한다. 뜻밖에도 이곳이 이 지역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자리잡을 곳일지도 모른다. 그곳이 어디든 이 지역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야 된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의 걱정을 받으면서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게 됐다. 서울에 있는 17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한 걸까? 이런 것도 깨닫지 못하고 나이 들어버렸다.
한 사람 몫을 해내는 것. 그리고 가족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것. 그것이 올해 나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