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근일, 나는 야근하고 있었다. 결국 한 줌도 안 되는 내 짐마저 챙기지 못했고, 쌓여있는 서류더미(라고 쓰고 쓰레기라고 부른다)조차 처분하지 못했다. 오로지 내 마음 편하겠다고, 나는 주말 출근을 결심했다. 어쩌면 이틀 연속 출근해야 될지도 모르겠다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홉 시 조금 넘어 출근한 나는 어제 보던 정산서류를 마저 보고, 학생들에게 보완 요청 메일을 보내고 메일 확인 연락을 했다. 인수인계했던 자료를 공유해달라는 요청이 있어 서류를 정리해 메일을 보냈다. 머그컵, 칫솔케이스(칫솔은 버렸다), 양치컵, 미니가습기와 선물 받고 아까워서 쓰지 못한 연필 세트를 가방에 담아 부모님 편에 들려 보냈다. 그러고 나니 오전이 지났다.
이 날은 도서관 봉사활동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나는 사무실을 나와 근처에 있는 도서관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연말이라 이용자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사람이 많았다. 도착하자마자 두 시간 반가량 앉지도 못하고 책정리만 계속 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은 연말연시에 가장 의욕적이 된다는 사실을. 그것이 도서관에도 적용될 거라는 걸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바쁘게 봉사활동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시스템에 대한 권한이 없어졌다. 그 순간 '아, 나는 이제 정말 여기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짱박아둔 서류뭉치들이 발견됐다. 파쇄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결국 계획했던 일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마 처음 생각대로라면 일요일에 출근해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 권한이 없어지는 걸 보니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참 묘한 일이다. 파일도 정리하고, 철해놓은 서류도 좀 더 다듬어 놓고, 시간이 없어서 미처 작성하지 못한 공문들을 작성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 부채의식이 고작 시스템에 대한 권한이 없어졌다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계기로 사그라 들었다.
이 주 연속 야근하면서 나도 지쳤고, 나도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출근일에 먼저 퇴근하는 선생님들이 전화하면 전화 받아줘야 한다든가, 야근하지 말고 차라리 전화를 받는 게 낫지 않냐고 그랬을 때 나는 매몰차게 "전화 안 받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어쩌면 나를 움직인 가장 큰 힘은 '전화 받기 싫다'였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좋지만, 일은 싫다.
팀장님은 퇴근하면서 "안 좋았던 건 잊고 좋게 마무리하자"며 악수를 건넸다. 나도 웃으며 응했다. 이제는 그도 그의 방식대로 나를 위하려고 했던 거란 걸 받아들이려고 한다. 다만 그게 나에게 맞지 않는 방법이었고, 지금도 나를 정말 위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동일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적어도 퇴사 후 회사 일에 대해 모르쇠하는 사유가 '팀장님'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다.
마흔의 재취업은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전직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또한 아무리 일에서 달아나려고 해도 스스로 일에 달라붙는 구제불능의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얼마나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이 구제불능인 성격을 고칠 수 있을까.
다음 스텝에서는 좀 더 성장한 나를 만날 수 있길 바라며.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