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움직임 <작가 프로젝트 : 이선아>(2020)
본고는 무용수 '이선아'의 작업과 '현존(presence)' 개념에 대한 단상이 녹아들어 있다. 발행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2020년 12월 관극 직후 발행하려 했지만, 2023년 4월이 되어서야 발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작업이 삶이라는 오랜 성숙을 거쳐 탄생되듯, 이 글도 이선아 작가의 농밀한 사유를 더 예민하게 담기 위해 쉽게 발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행의 지연 시간 동안 공연 평론가의 역할에 대해 곰곰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연 평론가는 작업의 크레디트가 전적으로 아티스트에게 있다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하며, 아티스트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지면에 오픈해야 하는지, 그의 사유를 정확하고 첨예하게 좇아가고 풀어내고 있는지를 매 순간 뒤돌아봐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2020년의 마지막 <월례움직임(MONTHLT PERFORMANCE)>이 사직동 남양빌딩에서 수행되었다. 총 38번째 <월례움직임>으로 만나게 된 작품은 <작가 프로젝트 : 이선아>다. 빌딩 302호에서 창작 무용가 ‘이선아’의 솔로 발표 형식이다. 이선아의 작업은 장소에 작업적 주제를 가지고 가며, 일상에 상상력을 더한 뒤 몸으로 느끼고, ‘왜 나는?’이라는 질문까지 나아간다. 본 작업에서는 ‘빈 무대-퍼포밍-빈 무대’의 구조를 짜놓았다. 302호에 들어선 순간 영상 <집 그날의 기억>을 보며 공간 곳곳에 전시된 작업의 과정을 함께 따라갈 수 있다.
고동색의 윤이나는 목재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뭇 따스한 분위기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공간에서 필자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았던 곳은 작가의 작업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 공간이었다. 영상 <집 그날의 기억>에서는 집에서 설거지 퍼포먼스를 하는 이선아 작가의 모습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영상의 진행과 함께 공간에 놓인 오브제들을 직접 만져보기도 하며 발표가 시작되기 전에 작업을 향한 작가의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위의 사진은 302호 입구 바로 앞 벽면에 진열해 놓은 오브제들이다. 특히 이선아가 써놓은 현존(presence)에 대한 메모가 인상적이다.
몸의 감각에 집중하는 것 / 현재 나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지하는 것 / 현재에 집중하고 / 나의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것. / 현존.(이선아,2020)
퍼포먼스론(Performance Theory)에서는 늘 현존이 강조되어 왔다. 사실 현존은 아직까지도 무어라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기도 하다. 무대 위의 배우가 가진 물리적 속성과 아우라의 발산 그 자체일 수도 있고, 배우를 넘어 오브제, 조명, 음향, 분위기 등이 주는 즉물적이며 숨겨질 수 없는 존재감이 될 수도 있다. 이는 필자가 그동안 공부하고 인식한 바로서의 현존이지만, 현존은 이를 뛰어넘어 복잡한 개념이고 다양한 개념으로 존재한다. 그만큼 현존은 어렵지만 요즘 들어 공연예술 종사자들 입에 쉬이(?) 오르내리는 단어가 되기도 했다. 현존은 복잡다단하며 고정되지 않는 개념을 가진 용어이기에 어느 공연을 보고 A가 말하는 현존이랑 B가 말하는 현존이 대략 일맥상통하지만 디테일한 의미는 어쩌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끔 들곤 했다. 현존에 대한 필자의 여담은 여기까지로 하겠다.
무대 위에서 수행하는 퍼포머에게 각자만의 현존 개념을 정리는 시도란 작업을 성숙게 하는 과정이다. 현존에 대한 작가의 메모를 관객으로서 접했을 때, 그 사유의 성숙함이 느껴졌다. 이처럼 이선아 작가는 현존에 대한 자신만의 인식을 정확히 글로써 정리하고자 시도했다. ‘현재’와 ‘집중’ 그리고 퍼포머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인식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작가가 생각하는 ‘현존하는 퍼포머’다. 이는 자신을 현존하는 퍼포머로서 포지셔닝하고 관객과 만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 아닐까.
이어 이선아의 발표가 시작된다. 공간의 불이 꺼지고 은은한 가스등 불빛만 남는다. 관객들은 조용히 퍼포머의 등장을 기다린다. 가만히 공간에 앉아있으니, 창문 너머 사직로에 크게 나있는 차도를 가로지르는 자동차 소리를 듣는다. 적막을 깨고 퍼포머는 날것의 육성 그대로를 통해 내레이션을 시작한다.
숲을 탐구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이선아는 ‘나무와 숲’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발화한다. 발화가 끝난 뒤 공간 한 곳으로 나와 움직임을 시작한다.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어 보이고, 동선의 반경이 크지 않다. 마치 나무가 가지 뻗듯 팔과 상체를 움직인다. 이러한 움직임 도중에는 영상 <집 그날의 기억>에서 손목을 돌리며 함께 따라오는 골반을 다시 감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손가락 마디마디의 섬세한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6월의 싱그러운 나무가 느껴졌다. 마치 이선아의 <매봉댄스 1 2 3 4>가 끝난 뒤 사람들과 함께 올랐던 6월의 매봉산에서 만난 나무처럼 말이다. 단단하게 공간 위를 딛고 있는 발은 마치 바닥 아래에 거대한 지탱력을 가진 나무뿌리와 같이 느껴지기도한다.1) 무릎을 꿇고 바닥과 맞닿는 움직임에서부터 동작의 반복을 매개로 한 나무의 회복과 서있는 자리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이라는 양가적 느낌까지 창출한다.
발표가 마무리되고 후반부 빈 무대가 관객들을 만난다. 영상 <그날은 that day>가 상영되며 그 안에서 여러 퍼포머들과 함께 작업했던 과정을 보여준다. 무대 위에서 앙상블을 이루었던 장면과 푸른 미장센으로 기억에 대한 고백들이 교차된다. 여기에서는 허윤경 안무가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 서영란 안무가의 할머니 장례식에 대한 기억 등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한 작가의 작업주제 또한 만날 수 있다.
피드백 세션은 302호 공간 안에서, 그 공간에 있는 모두가 서로의 현존을 감각한 채 ZOOM 채팅으로 진행되었다. 물리적으로 서로의 몸이 존재하는 상황 가운데 ZOOM 매체를 사용한 소통 방식은 흥미로웠다. 이 과정에서 관객과 작가는 공통의 약속을 만들어 대화를 했다. 개인적인 사담을 하고 싶으면 ‘ㅁㅁ’을 붙여 발언하고, 공적인 발언권이 주어진 상태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면 끝에 ‘ㅇㅂ’를 붙였다. 발언의 시작과 끝에 명확한 지침이 있기에, 창작진 측에서는 관객이 남긴 텍스트 간의 층위를 나눌 수 있는 섬세한 아카이빙이 가능해진다. 한편으로 이러한 약속은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마지막으로, 피드백 세션에서 이선아 작가가 직접 텍스트로 미리 정리해 둔 소감을 나누며 본고를 마무리한다. 몸으로 만나는 이선아, 텍스트로 만나는 이선아의 현존을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이선아가 자신의 세계를 열어 보이려는, 그것을 관객에게 차분하고도 강렬하게 발산하려는 욕구가 다듬어진 언어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자신과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언어를 골라내는 작업. 혼자서는, 늘 내가 익숙한 언어와 세계안에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을 혼자 하기가 버거운데, 나의 세계 밖에서 바라봐주는 시선이 있어서 좋았고, 다른 이의 언어를 통해 . 조금더 객관적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을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언어를 찾고 글을 정리하는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글로써 작업이 목표하는 것, 작업의 과정과 방향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작업을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의 작업, 작품 안에서 그걸 다 할 수 없는데, 종종 스스로 오류에 빠질 때가 있다. 이번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는데, 이 작업이 무엇인가, 내가 이 작업 과정을 통해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이런 것을 글로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이 이 월례움직임 작가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경험한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이선아, 2020)
1) 움직임에 대한 필자의 리뷰는 <작가 프로젝트 : 이선아>의 피드백 세션을 참고했다. 그 중 ZOOM으로 만난 관객들의 사유 두 가지를 바탕으로 글에 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