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그린피그 <엑스트라 연대기>, <주은길 단막극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의 무대 하수에는 고공 농성을 위한 전봇대가, 상수에는 고해소가 있다. 본 공연은 점거의 정신이 연대기적으로 펼쳐지는데,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듯 보이지만 그 최초의 정신을 간직한 '점거의 영혼'이 공연의 시작과 끝에 머무른다. 등장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함께 하고 있는 듯한 그 점거의 영. 저 농성 탑 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저 심해의 잠수함 바닥에 있던 군인이나 어느 공간을 점유하며 저항 불가능한 권력에 저항하고 있다.
본 공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장면은, '위'보다는 '바닥'에서 벌어졌던 '심해 잠수함 장면'이다. 바다는 저 아래이며, 저 위처럼 권력이 첨예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즉, 눈에 보이거나 삶에서 체감되는 권력뿐만이 아니라 땅 위의 평범한 일상에서는 느낄 수 조차 없는 또 다른 권력이 있다는 점을 느끼게끔 한다. 잠수함 장면에서는 해군들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한미연합훈련 중인 상황에서 선원은 두려움에 떨고 있고, 함장은 그에게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고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
심해 속에서 은밀하고도 강압적인 힘은 자석과도 같아 잠수함 주변으로 물고기로 분한 배우들이 몰려든다. 물고기들은 해군들의 대화를 슬며시 그리고 촘촘하게 엿듣는다. 마치 수면 위에서 물고기밥을 뿌려주면 저 아래에서 고기가 몰려들 듯, 인간이 바닷속까지 끌고 들어와 뿌려놓는 것에 몰려든다. 그리고 함장이 선원을 혼낼 때마다 몰려든 물고기들은 깜짝 놀라 도망간다. 이러한 물고기들은 마치 평범한 소시민들처럼 보인다. 어떠한 권력을 지켜보고 살아가고, 물고기가 물에서 살아가듯 자연스레 권력 주변을 헤엄치며 살아가지만 정작 권력이 휘둘릴 때는 그곳에 마음을 두다가도 그 작동방식에 두려움에 휩싸여 도망치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 말이다. 무엇보다도 심해에서 드러나는 선원과 함장 사이의 수직 관계, 그에 반하여 물고기의 수평적 움직임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주은길 단막극전>은 명동 삼일로창고극장의 작은 무대에서 막이 올랐다. '창고'라는 극장에서 관객을 켜켜이 쌓인 이야기에 밀착시킨다. 주은길은 2023년 부산일보신춘문예로 등단하였고, 극단 그린피그의 조연출을 도맡으며 이제 그 이름 세 자를 걸고 작가로서의 세계를 선보였다. 단막극전에서 펼쳐진 <산은 말한다>와 <우린 조화로운 꽃들이야>는 관객을 향해 폭발하는 에너지가 특히 돋보였다.
툭! 치면 터질듯한 슬픔을 지닌 학생(현수), 노루가 프리셋의 밀도를 진하게 상승시킨다. 무대 위의 숲은 시기마다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 숲에서의 사건을 보여준다. 모두 숲 속에 숨어있는 자들과 관계되어 있고, 노루라는 불가사의한 존재가 숲이 지닌 광활함과 신비함을 더한다. 동물과 사냥꾼은 끈으로, 군인과 군인은 총으로, 엄마와 아빠는 손전등으로 서로를 겨냥하며 자신이 왜 숲에 와있는지에 대한 본질을 망각한다. 존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비난과 조롱을 쏟아내는 동안 숲으로 상정되는 큐브를 중심으로 하염없이 달린다.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차는, 그러나 멈추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그들 사이의 질긴 무언가는 또다시 터져 나오는 에너지로 승화된다. 배우가 터뜨리는 에너지는 '노루어 번역 장면'에서 극한으로 치닫는다. 이 장면은 희곡에서 노루의 대사로만 표현되었지만, 본 공연에서 교수(번역가)가 등장하여 노루와 교수 사이의 아이코닉한 에너지 핑퐁으로 거듭난다.
동물로 분한 배우가 안경을 끼자 한국외국어대학교 노루어과 교수로 변신을 하며 노루의 말을 번역해 준다. 노루는 '악!' 하고 절규할 뿐이지만, 교수는 그 비명을 인간의 말로 차분하게 번역한다. 번역이 거듭될수록 노루의 비명은 더욱 처절해진다. 클라이맥스에서는 노루의 목이 찢어질 듯 불편한 균열까지 울려 퍼진다. 노루의 절규가 불안해질수록, 교수의 번역에 흔들림 없는 안정감이 지속될수록 두 배우가 뿜는 에너지의 밸런스가 조화로워진다. <산은 말한다>는 그 내용보다 무대 위에 존재하는 배우의 합과 강렬함이 돋보였던 공연이었다.
<산은 말한다>의 숲은 <우린 조화로운 꽃들이야>에서 식물원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이 식물원은 '조화'로만 이뤄져 있다. 꽃이 아닌 꽃, 조화 그리고 가짜 아닌 가짜를 상징하기로 하듯 의자와 같은 대도구부터 생수병 같은 소도구까지 소품이 모두 초록색 테이프로 테이핑 되어있다. 본 공연에서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남녀 사이의 환멸이 지독히 그리고 끈끈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러한 증오와 후회 속에서도 커플의 손을 녹색 테이프로 묶어놓은 연출이 돋보였다.
종반부에는, 에피소드가 마무리되며 신랑, 신부는 정지된 사진처럼 타블로(tablo)화 된다. 이윽고 작가가 하수에서 상/하강 무대장치를 타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 기중기와 같은 것을 이용하여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수법이다)처럼 등장한다. 작가는 자신의 부모님이 갈등 후 식물원에서 화해를 했던 시절에 대해 관객에게 설명을 해주며 이윽고 노래를 부른다. 작가는 배우의 몸을 대신 입었지만 극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에너지를 내뿜는다. 작가가 직접 등장하며 연극 밖에서 연극을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희곡이 '가짜'에 대해 말하는 듯하여도, 작가의 인생의 진실한 한 단면을 말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우린 조화로운 꽃들이야>는 신랑, 신부의 식물원과 같은 화해의 공간을 각자에게 떠올리게 하며, 익숙하면서도 어긋나버렸을지라도 그 속에서 새로운 결심을 피어나게 만들었던 관계를 보여준다. 분노던 사랑이던, 상대를 향해 끓어올랐던 에너지의 밀도는 남, 녀 사이의 심리적 다름으로 섬세히 표현되었고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어쩌면, 무대 위를 칭칭 감고 있던 초록색 테이프를 길게 늘어뜨려 객석을 함께 감아놓았어야 할 공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연극은 허구일 지라도, 극단 그린피그가 봄을 터뜨리며 뿜어낸 에너지는 진짜다. <엑스트라 연대기>, <주은길 단막극전>은 무대와 객석의 에너지 순환을 집중해서 느낄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엔데믹이 시작되며 맞이한 첫 봄에, 그린피그는 새 생명을 얻은 듯 그들이 지닌 고유한 생명력을 무대 위에서 전달한다. <주은길 단막극전>에서 조화(造花:가짜 꽃)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엑스트라 연대기>까지 열악한 노동의 현실 속에서도 조화(調和)롭게 세상을 살아내고자 치열한 시절을 보냈던 존재들의 몸부림은 무대 위 배우들의 땀방울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감각될 수 있는 피, 땀, 눈물로 흐르는 것들이다. 이 봄, 그린피그의 두 작품을 사유하며 저항, 자연과 사람, 사랑과 같은 세상을 돌아가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에너지를 다시 건네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