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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인 May 13. 2023

하나가 되기 위한 분노

극단 산수유 <12인의 성난 사람들>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극단 산수유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다. 공연에서 '레퍼토리'란 한 극단이 작품을 발굴 및 창작하여 정기적으로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는 작품을 말한다. 산수유는 2009년 창단 이후 특히 탄탄한 사실주의(realism)를 기반으로 꾸준히 번안 중심의 작업을 하는 극단이기에, 타 문화권의 작품을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게 가공을 해온 점에서 가치가 있다. 실험극이 꽃을 피우고 있는 동시대 대한민국 연극계에서, 극단 산수유는 사실주의 드라마 연극을 공고히 유지해나가며 플롯의 가치를 간직하고자 하는 면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그들만의 건강한 연극적 정신을 가진 집단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C) 극단 산수유 페이스북


너무나 화가 나서

돼지우리를 연상시키는 무대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돼지우리가 되기 직전의 정돈된 닫힌 공간이 있다. 공간의 오른편에는 작은 변소가 마련되어있다. 날씨는 푹푹 쪄서, 푹 찌르면 터질듯 한 비구름을 상상하게 한다. 더위는 극장 바텐에 달려있는 퍼넬 조명의 활짝 펴지는 강렬한 빛으로 표현된다. 이 공간에 16세 소년의 살인사건 재판을 위해 배심원장을 비롯한 배심원단 총 12명이 투입된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도 눈물도 없어보이는 간수에 의해 공간에 무작위로 우겨넣어진다. 12명의 배심원들은 성별, 나이, 직업, 성장배경, 가치관, 트라우마, 관심사, 성향 등 이 모든게 다른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이들이다. 이 좁은 공간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과를 만장일치로 모으는 것'이다. 과연 이들은 쉽게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까?


(C) 극단 산수유 페이스북


그럴 리가 없다.


가장 처음으로 의견을 모은 결과로 11:1로 유죄가 우세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죄의 의견이 조금씩 드러난다.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를 때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게 되는데, 빠르게 배심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인해 분노는 더욱 가중된다. 배심원들은 하나같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으로 부채질을 한다. 더위를 식힌다. 분노를 식힌다. 이 작은 공간에서 도망 갈 구멍은 없다. 그나마 있다면 공간 밖에 마련된 변소다. 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인 회피의 시간일 뿐, 배심이 끝나야 모든게 끝이다. 길어지는 배심 시간 내내 인물들이 부채질을 하는 비즈니스(business: 배우가 극중에서 의도를 갖고 하는 중요한 행동)가 내내 이뤄진다. 1번 배심원과 같이 무더운 날에도 부채질 한 번 없이 아래 위로 정장을 착용하며 시종일관 논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인물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은 부채질 때문에 더 힘들 법도 한데 그럼에도 부채질을 계속 한다. 부채질을 하는 행위는 단순히 더워서가 아니라, 어쩌면 각자의 삶 속에서 숨겨왔던 분노를 배심이라는 책임 하에 이성으로 눌러내고자 하는 행위 일 수도 있다. 또한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환기시키며 다른 인물의 어처구니없는 감정적 파도 앞에서도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로도 보여진다. 너무나 화가 나서, 손에 쥔 물건으로 서로를 휘둘러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식혀낸다. 이처럼 이성과 비 이성 사이의 줄타기를 하는 열 두 인물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본 공연의 묘미다.


논리의 깊은 곳에는

유죄이냐 무죄이냐를 판결하는 데 있어, 모두가 그럴듯 한 논리를 펼쳐내며 소년의 죄를 가려내려 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똘똘 뭉쳐진 그 중심 가운데에는 개인의 가치관과 트라우마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C) 극단 산수유 페이스북


겉으로 드러나는 논리를 한 꺼풀씩 떼어내 보았을 때,
그 안에는 비틀어지고 무너져내린 감정이 존재한다.


4번 배심원은 가난한 동네의 사람을 증오하고 있었던 차별주의자였으며, 5번 배심원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7번 배심원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전기의자에 가게 될지도 모르는 소년의 인생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오로지 8시에 하게 될 야구경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면모를 드러낸다. 이렇게 배심 공간 안에는 12개의 인생이 있다. 각자 삶에 대한 다른 렌즈를 장착한 채 소년의 사건을 바라본다. 배심이라는 목적을 잊은 채 크고 작은 언쟁이 일어나고, 각자의 마음 속에 생겨난 화 만큼 공간은 더러워진다. 코가 묻은 휴지조각들이 곳곳에 뿌려지고, 때에 맞춰 간수가 마실 물을 가져오자 갈증의 본능을 해소하기위해 배심원들이 물을 마시러 허겁지겁 몰려든다. 공간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물로 범벅된다. 죄를 가리기 위해 저마다의 옳음을 앞세우며 상대방을 몰아갔던 이성적인 존재들은 사라지며, 인간의 기본적인 식음욕을 채우기 급급한 존재들이 보인다. 7번 배심원은 너무나 더웠던 나머지 얼마 되지 않는 물로 세수한다. 이렇게 누구나 살고자 마시고 씻는 물인데, 혹여라도 무고할 수 있는 소년의 살고자 하는 욕구는 볼 수 없다.


나가며: 하나가 되기 위한 분노



(C) 극단 산수유 페이스북
<12명의 성난 사람들> 보며 
분노라는 감정에 시종일관 집중하게 되었다.


이 분노의 끝에 과연 무엇이 남았을까? 배심 공간은 돼지우리가 되었다. 분노만 남은 이 공간에서 소년은 없다. 극중 내내 소년은 등장하지 않는 것 처럼, 배심원들의 마음속에는 소년이 아닌 분노가 가득 찬다. 하지만 동앗줄이라도 잡 듯, 의견을 다시금 모으려는 시도가 반복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란 어쩌면 화로 점철된 과정을 겪어야 할 수도 있겠다. 극중 화를 환기하는 장치는 여러가지가 있다. 부채질, 간수의 등장, 갑자기 쏟아지는 비, 해우소 앞에서의 대화, 화장실 가기 등 배심원들은 끓어오르는 분노 앞에서도 자신이 옳은가, 타인이 옳은가를 점검한다. 분노를 피할 수도 없고, 소극적으로 피하곤 해도 곧 직면한다. 분노 가운데에서도 배심이라는 책임을 지고 갈등을 이끌어나간다. 사람의 마음이란 하나가 되기 어렵다.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나와 같기 어려울 테인데,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 열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야 하니 끊임없이 나를 누르며 나의 주장을 설득해야한다. 어쩌면, 분노에도 결국 목적이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 것이 아닐까.


그렇게 분노로 탄생된 돼지우리는 사회의 압축판 같았다. 제각기 다른 목적과 이유를 가진 분노가 모였지만 그럼에도 하나됨을 향해 가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로 인해 분노가 그저 분노로 남지만은 않게 되었다. 분노 자체는 소모적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한 분노의 끝에는 이 돼지우리 또한 하나의 공동체였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공연장 밖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 많은 분노를 마주하게 될 테다. 그 분노가 타인으로 부터 오던, 나 자신으로부터 오던 우리는 분노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돼지우리와 같이 엉망이 된 삶의 한 구석을 생각해본다. 내 분노의 곁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 공연이 막을 내리고, 칼 자루 하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이 칼은 소년의 칼과 같은 것이지만, 이것을 탁자 위에 꽂은 사람은 분노한 배심원이다. 공연에서는 소년이 사람을 죽였다는 의견이 전개되지만, 우리가 어쩌면 삶에서 분노로 누군가를 파괴하고 있지 않을까? 마음을 모으기 위해 분노를 쓰지 않았던 시간에대한 날카로운 칼이 양심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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