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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인 Jun 28. 2023

존재의 공허: '나나', '너나', '누구나'

극단 고래 <굴뚝을 기다리며>

#부조리극 #존재 #공허 #잉여 #헛되나참되다


배경 지식: 부조리극

부조리극이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에서 꽃피운 희곡 양식이다.

전쟁으로 인한 무수한 죽음과 삶의 허무, 그리고

이 잔인한 살육이 언젠간 종식되리라는 헛되고도 찬란한 희망이

공존하는 시대에서 더이상 이 세계가

'이성'으로는 설명 될 수 없다고 믿게 된 예술가들이

각종 모순과 역설을 섞은 언어유희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존재의 무의미, 인간의 소외, 고독, 불안, 상호간의 소통불가능 등

인간의 실존적 문제가 중심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형식에 있어 언어의 비틀림과 창조적 변형,

리듬감 그리고 반복이 돋보이며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려면 도저히 할 수 없고, 이해하려 하면 할 수록

관객이 스스로의 비이성과 비논리에 직면하게 되는

부조리극(Absurdes Theatre)이 탄생 되었다.


그 대표작으로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존재하는 허허벌판에서

디디와 에스트라공은 자신이 왜 여기 존재하는지 모른 채

오지 않는 혹은 오지 않을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C) 극단 고래


극단 고래 <굴뚝을 기다리며>는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의 정서와 맥락을 이어받아

동시대 대한민국 사회상을 적절히 비출 수 있도록

일용직 노동 문제, SNS를 통한 갓생의 삶,

기술의 발달이 주는 폭력과 허무에 대한 연극적 폭로를

어둠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있는 양면적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또 다른 세계에서 나를 인식하려는 몸부림


굴뚝이 높은 하늘 위로 치솟았고

저 아래의 땅과 멀어진 사람들이 있다.

바로 '누누'와 '나나'이다.


이 굴뚝에는 사다리 조차 없어 땅으로 내려갈 수 없다.

누누와 나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세상을 조망하며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는 일 뿐이다.

굴뚝이라는 공간에서 마주하게 될 존재들과

대화를 하며 시간을 때우고

언젠간 '굴뚝'이 올 것이라는 믿음과 불신과 함께

굴뚝을 기다리는 지난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C) 극단 고래


마치 무한의 사이클처럼 반복되는 삶을 상징하듯

반원으로 지어진 굴뚝은

그 뒤의 나머지 절반의 생이 존재하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얼마 만큼 이 곳에서 더 살아내야 하는가.
얼마 동안 이 곳에서 더 기다려야 하는가.


누누와 나나는 언제부턴가 항상 함께 이 굴뚝에 있었지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새로운 사람을 마주하듯

서로의 존재에 대해 까마득해진다.

하루가 시작되며 서로를 마주할 때

서로에 대해서 낯설게 물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여기는 굴뚝인데, 굴뚝을 기다린다고?

누누와 나나는 시간처럼 삶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논리적 언어유희를 통해

마치 합리적 사고방식을 잃어버린 듯 하지만,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을 거듭해서 던진다.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보듯, 누누와 나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자 애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여기, 굴뚝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굴뚝에서 '굴뚝'을 기다리고 있다는

알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C) 극단 고래


'청소'의 등장으로 인해 공연의 템포는 한층 농밀해진다.

청소는 누누와 나나의 굴뚝을 청소하러 온 인물이자

이 시대의 일용직 미화 노동자를 상징한다.

그는 성스러운 노동을 하는 성자이며,

성자는 어떠한 순간에도 화를 낼 수 없다.


자본을 위해 노동이란 족쇄를 차고 사는 세상에서

또 다른 층위의 소외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있다.

청소는 굴뚝 청소에 온 몸을 바치듯

신명나는 북소리와 함께 청소 춤을 춘다.

북의 장단은 시간을 거듭할 수록 빨라지고,


청소의 땀방울에 서린 공허와
존재의 잊혀짐에 대한 공포가
한 데 뒤섞인 인간을
절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 장면은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서마저 도태된

한 인간의 몸부림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처럼 <굴뚝을 기다리며>에서는

또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몸부림이 안타깝지만

그것이 그저 연민에서 그치지 아니하며

웃음을 통해 관객을 날카롭게 찌르도록 한다.


존재의 공허: '나나', '너나', 누구나'


누누와 나나의 잉여성은

그들의 의상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다.

목이 늘어난 회색 티, 추리닝 바지,

무겁디 무거운 회색 작업화를 통해

어디에선가 노동을 하고 있을 법 한

그러나 그 노동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듯 한

인간 군상을 나타낸다.


(C) 극단 고래


그들에겐 잉여로움이 느껴지지만

그들이 신고 있는 작업화의 무게로 인해

노동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소시민의 모습을 드러낸다.


(C) 극단 고래


그렇다고 그들이 이 굴뚝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가?

그들은 식물을 가꾼다.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와는 다르게

그들의 주변에는 푸른 식물들이 존재한다.

30도의 굴뚝 온도에서도 생명력을 발하는 식물들은

누누와 나나가 당장 인식 할 수 있는

가시적인 희망으로 피어있다.


어떠한 희망도 없어보이는 삶일지라도.

(C) 극단 고래

존재의 공허는 '굴뚝'을 저울질 하듯

그 희망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한다.


나나는 굴뚝을 끝까지 기다리려는 희망을

누누는 굴뚝이 오지 않을것이란 불안, 허무를 드러내며

하루 하루를 견뎌낸다.


그들의 삶 가운데 스며드는 '갓소'와 '미소 로봇'은

그들로 하여금 갓생이 주는 스펙터클한 현혹과

기술이 주는 친절한 편리를  마주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속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갓소는 참 밝다. 그녀는 어떠한 삶의 고난과 맥락을 뒤로 하고도

셀카 어플 앞에서 덕 페이스(duck face)를 지으며

노 필터 기능으로 보정해서 자신의 삶을 증거해낼 것 같다.

SNS에 업로드되는 완벽한 루틴과

완벽할 수 없는 삶의 공허를 메우려는 발버둥은

우리에게 주어질 열려있는 미래조차

기다릴 수 없게 만드는 현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소 로봇은 늘 미소를 장착하고 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결코 인간을 향한 진심이 아니다.

미소 로봇을 통해 공연이 드러내는 진실은

메뉴얼에 의한 폭력이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결코 지치 지 않을 것 같은 기계적인 육체성과 동시에

미소 로봇을 수행하는 '배우의 몸'이 무대에서 지쳐감을 통해

결국 기계성 또한 그 한계가 있음이다.


이처럼 <굴뚝을 기다리며>는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을

갓소, 미소 로봇이라는 캐릭터의 등장과 함께

어둡고 아이코닉한 방식으로 풍자한다.


나나, 너나, 누구나
이런 공허한 삶에 포섭되어 있다는
현실에 대한 인정과 저항의 톱니바퀴를
동시에 맞물리게 하여
우리를 묶고 있는 어두운 재들이
굴뚝의 연기가 되어
해방의 사유로 날아가게끔
성찰적 대목을 남긴다.


(C) 극단 고래


그러나, 공연의 후반부는 전반부와 중반부까지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언어의 열기를 식히기라도 하는 듯

후반부에는 영상을 통한 연출이 주를 이룬다.

이로 인해 극의 균형이 깨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연출적으로 의도된 30초 가량으로 감각되는 긴 암전과

암전 속 대화 또한 관객의 집중력을 흐뜨러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후반부 직전까지 빠르게 몰아쳤던 극의 템포는

무대 위 겨울이라는 계절적 특성과 잦은 암전으로

갑작스러운 렌토(Lento: 길게 끌어 느리게)로 변주된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그 템포 창출에 있어서

더욱 세심한 변주가 이루어졌다면

관객의 웃음 완급 조절과 동시에

연출적으로 더욱 풍성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극이라

조심스레 말 하고 싶다.


나가며: 헛되나 참되다


(C) 극단 고래


모든 공허와 인간 실존의 무상함을 이야기하던 연극은 참되다.


헛되나 참된 시간을 마무리 하기 위한

커튼콜은 무대 위 굴뚝보다도 굵직한 인상을 남긴다.

존재의 죽음을 상징하는 차가운 눈이 내리는 날

저 땅 아래에서는 불꽃놀이가 이뤄지며

또다른 삶의 지속이 이어지고 있다.

굴뚝 위에 홀로 남은 나나는 두툼한 비니를 쓰고

다시 굴뚝 한 켠의 비닐집 안으로 절뚝절뚝 들어간다.

쓸쓸하고 외로움을 가진 인간 본연의 고독을 풍기며

다가올 수도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는 새 날을 맞이하러 간다.


<굴뚝을 기다리며>를 통해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진 고독과 공허

그리고 언제까지 지속될 지 모르는 어두운 밤

그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다음날의 태양에 대한

언캐니(uncanny: 익숙한 것에서 오는 낯선 두려움)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은 헛된 것들의 연속일지라도

연극이 관객의 감각을 건드리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발언할 때

연극은 결코 참된 진리를 비추는 존재로서

나아가리라는 헛되나 헛되지 않은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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