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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혜인 Mar 10. 2024

동물, 역사 그리고 인간

극단 그린피그 역사시비 3월 <양떼목장의 대혈투>

#양떼목장의대혈투

#그린피그 #주은길 #연극


잔디가 곱게 깔려있는 무대는 자취방이다.

얼룩말 세로는 능동의 한 우리에서 탈출했지만 마취 총에 맞아 다시 포획된다.

양은 자신의 자라나는 털을 감당치 못할 것 마냥 새하얀 털 속에 스스로를 파묻는다.

아주 슬프게, 처절하게.


<양떼목장에서 대혈투>는 동물의 마음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돋보인 공연이다.

마치 대신 말해주는 것처럼, 인간이라는 배우들이 동물의 답답한 속마음을 내뱉는다.


극이 후반부로 흐를수록 장면은 동물에서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 변한다.

다시. 다시. 다시. 를 반복하며 다양한 모습의 '나'를 살아내는 남자가 있다.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증명이라도 해내려는 듯이, 그러나 아버지는 망부석처럼 의자에 묶인 채 봉투로 얼굴을 가리고 아들을 외면한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남자는 계속해서 '다시'를 외친다.

정말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다시' 하지 못하는 단 한 번의 선택. 그는 죽는다.


극은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고

삶에 대한 출구를 찾으려 애쓰는 비인간/인간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답답한 건 인간이나 동물이나 못 참는 건 마찬가진가 보다.


인간도 삶이 있고, 동물도 삶이 있는데 어째서일까 동물에게 '삶'이라는 단어가 붙는 게 자연스러운 건가 의문이 들었다. 인간에게는 '삶'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동물에게는 '삶'보다는 '생'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삶과 생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올해 그린피그는 중장기 프로젝트로 '역사시비'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1월부터 2월을 거쳐 3월의 본 공연까지 꾸준히 그린피그와 함께하고 있다.

<양떼목장에서 대혈투>는 동물을 소재로 어떻게 역사적 관점을 풀어낼지 참 궁금했다.

그리고 동물과 역사가 무슨 상관이 있을지도 궁금했다.

조금이나마 피부로 와닿을 수 있었던 역사는 작년 3월 어린이대공원에서 얼룩말 세로가 탈출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창작했다는 사실이다.

세로는 울타리 속에 있을 때도 시선을 피할 수 없었고, 울타리 밖에 있을 때도 시선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다.

관심, 호기심, 동정, 혐오 등 동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종류의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한정된 틀 안에서 주어진 안전한 자유가 좋은 자유일까?

틀 밖을 벗어났는데 어느 정도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은 감당하면서 주어진 생을 사는 게 좋은 자유일까?

내가 만약 세로라면 어떤 생이 더 좋은 생이라고 느꼈을까?

그래도 우리를 박차고 나가본 건 절대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다. 도로 위에 서있는 나를 보며 인간들이 경멸의 눈빛을 보낼지라도.


포획당해 다시 우리로 돌아온 세로는 냉장고에서 새로(소주)를 꺼내 마신다.

술이 술술 들어간다.

술기운 중에 세로의 엄마, 아빠가 등장하는데 극 중에서 실제로 살아있는 것 같진 않다. 이미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부터 헤어졌기에 세로가 보는 환상일 수 있다.

동물에게도 부모를 잃을 때 느끼는 감정이 있을까.

필자는 이 장면이 <양떼목장의 대혈투>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한다.

동물의 부모를 보며, 인간인 내가 마음이 아파진다.

다시 우리에 갇히게 된 상황도 마음에 안 들고, 부모 없이 어린이대공원에서 생활해야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세로는 자기 자신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라도 마시며 생을 메워보지만 어쩔 수 없이 전화 찬스를 쓴다.


사냥꾼이 장총을 들고 등장한다.

무대 위의 불이 아주 어둡지는 않게 어두워진다.

세로가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사냥꾼을 쏴 죽인다.

세로가 할 수 있는 가장 동물적인 선택. 나의 분노에 솔직하기.


공연이 막을 내리고,

무대 위에는 죽은 사냥꾼의 시체와 세로의 엄마, 아빠가 남아있다.


<양떼목장의 대혈투>는 동물을 소재로 연극을 수단삼아 역사를 쓰려고 한다.

그런데... 주구장창 동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도 결국 동물만큼 불쌍한 나 자신(인간)을 외면할 수 없고, 무대 위에 존재하는건 인간이고, 연극을 한것도 본것도 인간이고, 동물의 마음을 상상해서 글을 쓴 자도 인간이고, 역사도 인간이 쓰는거다.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킬 비인간스러운 무언가가 미래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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