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fie Jul 24. 2021

Narcissist

자신감과 불안감 사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본 영화 크루엘라는 여러모로 굉장히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악역인 남작부인이 극적으로 보여주는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파괴력과 매력이었다.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파괴적인 아주 순수한 악당이기는 하지만 다른 시점에서 본다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에도 거침이나 억누름이 없는 순수하게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 영화는 폭주기관차저럼 거침없이 질주하는 두 여자주인공 사이의 긴장과 공감, 불안과 자신감, 그리고 그런 양극단 사이에서 미새하게 스며나오는 행복감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주었다. 


영화가 끝날때까지 내 기억에 남작부인은 결코 웃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웃는 방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혹은 달리 말하면 웃을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기애적 성격이 병리적으로 가는 가장 큰 요인은 그 '자기'의 영역이 지나치게 좁아지고 문턱이 너무나도 높아져서 일정 수준 필요할 때 조차도 확장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그 재능이 솔직히 꽤 마음에 들었던 부하직원 크루엘라조차도 그 '자기'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결국 가차없이 밀어버려야 할 혐오스러운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하지만 난 그녀가 행복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감은 어느 정도는 행복감에서 오는 것이라는 나의 가정을 대입해 추측해본다면 그녀가 여전히 웃음기없는 표정으로 축배를 들었을 때에 여전히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혐오를 내뿜는 표독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조금은 행복해보였다.  


행복을 정의하는 방법은 참 사람마다 다르고 복잡하고 오묘하다. 나의 경우는 늘 스스로 어딘가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컴플렉스를 바탕에 깔고 살아와서였을까 아주 사소한 계기라도 그 컴플렉스에서 해방된 순간은 나에게 행복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영화 크루엘라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바로 그런 자기애가 가져다주는 해방감의 모습이었다. 악역인 남작부인의 과거는 거의 묘사된 바가 없지만 상상해보건대 아마도 자기와 비슷한 병리적인 부모 밑에서 정서적 학대에 길들여지며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 혹은 사랑받는 것의 의미를 부정당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그 결핍을 스스로라도 채워주는 수단과 방법, 순간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남작부인이 또 한번의 사업적 성취를 맛보고 ‘나 자신에게 건배’ 를 청할 때의 순간은 아마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내가 외국어로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했을 때 배운 가장 중요한 생존요인은 자신감,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자기애였던 것 같다. 들떴을 때,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수단으로든 행복감이 높아졌을 때 외국어로 하는 대화는 갑자기 순간 너무나도 쉬워졌다.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긴장했을 때, 더 세밀히 분석하자면 불행감이 높아졌을 때 아주 쉽고 간단해야 했을 대화도 지나치게 어려워졌다. 그날 아침에 동료나 수퍼바이저에게 기분좋은 피드백을 듣고 시작한 환자들과의 대화는 너무나 막힘없이 부드럽게 영어가 터져나오지만 무언가 기분나쁜 긴장으로 하루를 시작했을 때는 아주 단순한 말도 혀 끝에서 굳어져 버리는 것이다. 


성격심리학을 공부할 때 가장 기억에 남았던 한 가지는 자존감, 정확히 말하자면 self esteem에 관한 심리학계의 연구결과였다. 우리말로 흔히 자존감이라 번역하고 표현하는 그 개념은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채워넣어야 할 하나의 정답 혹은 절대적 가치같은 문화적 경향이 있는 듯 했다.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라는 말이 마법의 주문처럼 여기저기서 외워지고 치켜세워지기 때문에. 하지만 그날 그 수업시간에 배운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너무 낮으면 물론 인간의 삶에, 더 정확히 말하면 주관적 안녕감에 좋지 않은 경향이 있지만 너무 높아도 마찬가지로 마냥 좋지는 않은 경향이 있다는 것. 이 배움이 아마도 내가 심리학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 중의 하나일 것이다. 복잡미묘한 인간의 삶과 행동에 정답따위는 없으며 무조건 갖춰야할 덕목이라는 것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 나르시시즘이란 이것과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지만 나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꼭 일정 소량은 갖추면 좋을 듯한 혹은 경험해 보면 좋을 듯한 악의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이코 남작부인 없이는 에스텔라가 크루엘라로 탄생할 수 없었듯이. 우리에게는 자기애적 악마가 필요한 순간이 있고 그 뒤틀린 자신감에 취해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경험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자신감에 들떠서 갑자기 영어가 너무 술술 잘 나온다고 느꼈던 그 경험 자체가 ‘아 나는 이제 영어를 어느 정도 잘 하는구나’라는 삶의 이정표를 새로 찍어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뻔뻔하게 타인의 도움과 희생으로 성공해 놓고도 자기 자신에게 축배를 올리는 남작부인은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 악당에게서 배울 수 있는 인간 행복의 주소는 이기심과 자만 사이를 가로질러 불안과 좌절을 우회하는 그 언저리즈음에 있어 보였으므로. 


Rose, noir, permenant 2019


작가의 이전글 Greed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