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트라우마, 남겨진 자리, 자살생존자
Survivor 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동안 공부해왔던 상담과 영성 전공에서는 아마도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단어로 배웠던 것 같다. 수년간 읽고 배우고 믿어온 책 속의 survivor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삶의 현장, 특히 가장 치열한 생존의 현장인 대형병원에서 마주한 그 민낯은 생각보다 아주 거칠고 뭐라 표현하기 불편한 그런 것이었다.
어느 당직중에 만났던 이 환자는 대형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한번의 대수술을 거치고 나서 회복중에 있었지만 이게 과연 회복이라 할 수 있을지 앞으로 얼마나 더 병원에서 이 지겨운 과정을 반복하며 갇혀있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런 사람중의 하나였다. 처음 만나서 내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그는 봇물터지듯 자기이야기를 쏟아냈다. 막혀있던 감정의 둑이 터지며 그 안에 가득차 있던 피비릿내가 섞인 흙탕물이 홍수처럼 쏟아지듯 그의 이야기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는 그 자체로서 재난이었다.
이 50대 백인남성은 옆에서 운전하고 있던 여자친구가 동반자살을 기도해 큰 교통사고를 낸 탓에 운전자였던 여자친구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본인은 거의 반신불구에 가까운 심각한 중상을 입었으나 겨우 목숨을 구하고 살아남았다. 이 사연조차도 처음에는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다른 의료진들이 기록해둔 내용을 보고나서야 그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그 분노와 슬픔과 고통과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어떻게 다 처리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를 품고도 멀쩡게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버거워보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흔하게 당연한듯 자연스럽게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일이었다. 자기사연을 봇물처럼 쏟아냈던 그 환자처럼, 끝없이 둑을 쌓고 쌓아서 안에서 소용돌이처럼 들끓는 감정을 결국은 한번씩 터뜨릴, 그런 기회가 필요할 따름이다. 그의 재난은 이제 막 시작했고, 그는 그 감정의 홍수에서 이제 막 헤험쳐 나왔다. 혹은 아직도 헤엄치고 있는 와중일지도 모른다. 생존자로서의 삶이 막 시작되는 순간의 그를 만났고 아직도 그의 상기된 얼굴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트라우마 속에 남겨진 자리라는 것은 참 잔혹하다. 병실에서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만신창이의 몸으로는 더더욱이 고통스러운 자리다.
그래도 그가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그의 고통의 자리 그 곁에 잠깐이지만 같이 있었다는 것을. 생존자의 이름이 숭고하게 되는 것은 결국 그의 발버둥 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있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어느 순간에는 자기 트라우마의 버거움에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로부터의 생존자가 된다는 것의 무게에 지치기도 한다. 그럴 때에 그 터질 것 같은 둑을 허물어도 좋다는 것을, 그런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도 듣는 것도 반응하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모두 엉망진창의 재난일 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에는 힘이 있다. 거기에 작은 한 귀퉁이의 마음을 쓰고 새로운 의미로 담아내는 것은 생존이 새로운 삶의 한 방식으로, 살아낼 만한 양식으로 한 글자씩 새로 쓰여지게 하는 기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