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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가영 Feb 14. 2022

완전히 심심한 오후

길 위에서 쓰는 글 1.5

출발: 카페 리카르도
도착: 우리 집
짐: 무인양품 선물 꾸러미, 델피늄 한 단, 연필 두 자루, 편지지 세트



오늘은 특히나 짐 없이 가볍게 집을 나섰다. 가방도 생략했다. 덕분에 양쪽 주머니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버스를 타게 됐다.

오전 열한 시 오십구 분. 우리는 버거집에서 만났다. 캐주얼한 예술가의 소개로 가게 된 식당이었는데, 그는 이 버거집을 ‘인생 버거 가게’로 수식했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생각했다. 어쩌면 나의 인생 버거도 이것이 아닐까. 빵의 부드러움, 퍽퍽하지 않은 패티, 깔끔한 소스. 여러모로 균형 잡힌 맛이었다.

버거가 나오기 전 햄신은 우리에게 바다를 선물해주었다. 마침 휴대폰 뒤에 카드를 끼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슬며시 바다를 넣어보았다. 큰 몸집으로 고요하게 춤추는 푸른 물결에 내리는 햇살에서는 은빛이 감돈다는 걸 알았다. 이제 나는 손에 바다를 쥐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모두 덕분이다.



이어지는 코스는 우리가 스며든 카페, 호핀치였다. 우리 외에도 호며든 사람들이 적잖았는지 자리가 없었다. 발걸음을 돌려 카페 살구 다방으로 향했다. 살구 다방의 테마는 ‘선’으로 묶이는 듯했다. 선이 고운 자기 잔과 유리컵. 자연스럽게 흐르는 아네모네와 버터플라이, 델피늄과 마가렛의 줄기. 우리는 그 안에서 또 다른 선이 되어, 우리이기에 떠오른 이야기들을 즐거이 나눴다.



캐주얼한 예술가와 새로운 장소로 가는 길. 반가운 사람을 또 만났다. 십 분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기분은 공중부양에 가까웠다. 짤막한 거리를 함께 산책했다. 말하진 못했지만 별안간 파리바게트가 조금 더 멀리 있길 바랐다.


더 걸어 도착한 곳은 캐주얼한 예술가가 소개한 ‘일하기 좋은 카페’였다. 역시나 최근 갔던 좋은 곳들은 캐.예의 큐레이션 안에 있었는데, 식당부터 카페까지 두말할 필요 없이 절로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 공간들이었다. 인테리어도 메뉴도 모두 달랐지만 동일하게 기본에 충실했다.


캐.예는 5시부터 회의를 해야 했고, 그 전 한 시간 동안은 회의를 준비한다고 그랬다. 4시부터 8시까지. 내게 주어진 4시간의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책도 아이패드도 노트북도, 펜도 종이도. 아무것도 없는 내게 주어진 완전한 심심함이 생경했다.


우선 카페에 있는 잡지 한 권을 골랐다. 자리에 앉아 카푸치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종이와 펜이 간절했다. 잠깐 카페에서 나와 문구점을 찾았다. 지도가 가리킨 문구점은 이미 문을 닫고 없었고, 나머지 문구점들은 너무 멀었다. 편의점 두 곳을 돌아 마지막에 도착한 곳에서 시험용 연필 세트와 편지지 세트를 샀다. 카페로 돌아와 새로 산 종이에 필기를 해가며 잡지를 읽었다.


잡지는 일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는데, 요즘 내가 준비하는 배우고 가르치는 커뮤니티에도 적잖은 인사이트를 주었다. 우리는 왜 서로에게 배워야 하는지, 내가 이 일을 시작하려고 했던 이윤 무엇이었는지 오래도록 천천히 물었다.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이 너무나도 많은 미완의 존재에게, 그리고 나에게 가장 안전하고 마땅한 공간과 시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되길 바라보았다.



아쉽지만 글을 마쳐야겠다. 버스가 나를 목적지에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마땅한 가방이 없을 땐 물건을 잃어버리기 쉽다. 내가 모르는 새 주머니에서 물건들이 뛰쳐나오기도 한다. 바리바리 짐 싸들고 오면서 사진에서 보이는 연필 두 자루를 잃어버렸다. 휑한 주머니를 만지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손가락만 한 휴대용 가방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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