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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가영 Sep 23. 2021

빼기의 세계

사과농장으로 떠납니다.

저는 이제 내일이면 거창으로 떠납니다. 영영 갈 것처럼 거창하게 썼지만 실은 고작 일주일이에요. 기대가 되면서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해야 할 일이 적잖기 때문입니다. 대학원을 준비한다고 스터디도 만들었고, 영어 시험도 준비해야 합니다. 공부 싫어하는 제가 공부에 재미를 붙여보려니 그마저 부담스러운데 열심을 다해야 하는 지금 이 시기에 일주일간 여행이라뇨. 말도 안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여정을 내일 떠납니다. 노트북과 디에스엘알을 챙겨갈 심산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녹취록을 따게 되지는 않을까, 새로운 작업을, 영상을 만들 일은 없을까 하며 짐을 하나하나 늘렸는데요. 그러다가 나는 왜 거창에 가는지 다시 묻게 됐습니다. 일주일만 바짝 쉬고 그다음부터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지금의 저는.


그냥 딱 멈추고 무작정 훌훌 떠나는 재질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젖은 솜마냥 무거워진 것일까요. 눈꺼풀만큼이나 무거운 짐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어깨가 무거워 지금은 하나하나 짐을 덜어내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카메라를 뺐습니다. 대신 그보다 조금 덜 무거운 필름 카메라와 유통기한이 2년 지난 필름 두 롤을 넣었어요. 정말 담고 싶은 순간이 아니면 꺼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저의 문구 세트를 뺐습니다. 편지도 잔뜩 쓰고 필사도 하고 싶어서 엽서와 봉투를 잔뜩 챙겼더랬습니다. 제가 직접 만든 엽서에, 그와는 조금 다른 질감의 종이와, 회색과 미색의 에이포 용지를 작게 자른 명함 용지까지. 필요한 것을 꾹꾹 눌러 담은 세트였는데 두 번 고민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게는 아름다운 색색의 펜들이 아주 많은데요. 그중에서 만년필 두 자루만 챙기기로 합니다. 아, 책이 있어서 연필 한 자루를 더 챙겨야겠네요.


책도 욕심내고 싶었는데 두 권만 챙겼습니다. 작년 거창에 들고 간 시집 한 권과 조금은 무거운 책 한 권입니다. 물론 무게는 가볍습니다. 대신 내용이 무거워서 얼추 균형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노트북을 빼기로 합니다. 이건 좀 큰 결심이 필요했는데요. 이미 마음속에서는 지난 일주일 동안 여러 번 넣었다 뺀 노트북이라 가져간다고 최종 물품 리스트에 적어놓고 난 뒤에는 번복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또 변덕이 심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동행하는 벗과 짧은 상의를 한끝에 빼고 말았습니다. 마음 편하자고 가져가기에는 노트북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아이패드와 블루투스 키보드를 챙기려고 합니다. 타이핑도 좀 해야 하고, 가서도 짤막한 회의에 두 번 참여해야 하니까요.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은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미루어두고 훌쩍 사과밭으로 떠난다는 건 <충동>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충동적 예매가 이렇게 이롭습니다. 한편으론 약속을 하면 꼭 지켜야 하는 성격 덕분이기도 합니다. 작년부터 거창에 놀러 간다고 말을 여러 번 해두었더랬죠. 간다 간다 해놓고 가지 않는 것은 제 삶의 신조와 반하는 일이라 이렇게 또 일주일 간의 휴가를 얻게 되네요. 행복하고도 불안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쓸모없고도 아름다운 질문에 적극적으로 마음을 쏟으며 오래도록 엎드리거나 누워있으면서 실험이나 상상에 대해 고민하고,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도 알아가보기로 합니다.


오늘 저녁은 <빼기>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녁이라기엔 다소 늦은 밤인가요? 작년 10월부터 올해 초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름다운 1학년 친구들에게 빼기를 가르쳤음에도 여전히 빼기의 세계는 오리무중입니다. 그들은 제게 한 번도 빼기란 무엇인가요 선생님 하고 묻지 않았지만 만약 그런 질문을 받았더라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오늘의 제게 빼기를 가르치라고 한다면 7-2 따위의 식을 말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맛본 빼기의 세계에서 덜어낸 것으로 비어진 자리에 어떤 것이 채워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도 큰 결심하여 여러 짐들을 덜어낸 만큼 쓸모없는 생각들을 꾹꾹 눌러 담아 와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스킨라빈스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가 스몰 사이즈 컵에 쌓아주는 곱곱절의 아이스크림만큼 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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