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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May 05. 2023

네 살과 보내는 일상

제한하기

네 살 앞에 꼭 붙이는 말이 있다. ‘미운’. 미운 네 살의 단편을 볼 기회는 많았다. 아이는 보란 듯이 엄마 말을 반대로 듣고, 엄마의 화는 머리끝까지 차올라 뚜껑이 열리는 그런 장면. 저런 단편이 끝도 없이 이어지면 엄마가 괴롭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때의 나는 실제의 반의 반도 가늠하지 못했다. 엄마가 어떻게 잘하면 아이가 좀 덜 까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같이 한 걸 보니.


정확히 한국 나이로 4세가 되는 올해 초부터 우리 집 네 살은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어 하고, 그만하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고, 안 된다고 하면 눈물 즙을 짜내며 거짓으로 울었다. ‘아, 이래서 미운 네 살이라고 하는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루의 반은 ‘안돼, 하지 마, 그만’에 쓰는 것 같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안 할 수가 없었다.


주차장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과 같이 위험한 행동이나 밥을 먹기 전에 간식을 요구하는 것과 같이 안 좋은 습관은 당연히 제한을 두어야 한다. 부정적인 단어를 결국은 쓰게 된 후에 다짐한 건, 하더라도 끝까지 다정하게 말하기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소리 지르는 나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고치고 싶었다. 소리친 날은 아이가 잠들고 나면 다시는 소리 지르지 말자 다짐했지만 금세 또 폭발했다.


그냥 다짐만 해서 될 게 아니었다. 어떤 포인트에서 제어하지 못하고 소리치는지 곱씹어 보았다. 크게 세 가지 원인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첫째는 아이가 내 말을 알아듣고도 무시한다는 생각. 둘째는 내가 너무 아이를 받아주고 있다는 누군가의 시선. 셋째는 피곤이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여러 번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숱한 상황에서는 아이가 내 말을 다 알아듣고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기서 ‘알아듣는다’는 말은 단순히 문장의 뜻을 안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엄마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나에게 저런 지시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이해한 상태를 말한다. 이상하게 나는 아이가 그만큼 생각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시부모님은 우리 집 네 살이 두 살, 세 살일 때부터 부드럽게 하지 말고 아들이니 강하게 키우라는 말을 만날 때마다 하셨다. 마침내 네 살이 되어 통제할 상황을 직접 보시자 나긋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내가 못마땅하셨는지 아이를 너무 받아주며 키우지 말라고 하셨다. 거기에 더해 잠깐 다닌 어린이집에서도 아이를 오냐오냐 키우는 엄마로 낙인찍혔으니, 제한 둘 일이 생길 때마다 ‘강하게’라는 단어가 등 뒤에서 쫓아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는 괜찮다. 오래 기다려주고 덜 상처받는 방식으로 아이에게 제한을 둔다. 그러나 피곤이 덮치면 나약한 내 모습이 마구 드러난다.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같이 설거지하자고 해놓고 물로 장난치는 아이를 마구 혼낸다던지. 키오스크 잔돈 구멍에 손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는 아이에게 몇 번이고 그만하라 말했지만 멈추지 않자 남 눈치가 보여서 손을 확 잡아채는 바람에 아이 손에서 피가 나도록 다치게 했다던지.


소리치거나 화내는 나를 올려다보던 아이의 눈빛을 떠올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나에게 대항할 수 없다. 내가 소리치는 게 싫고 무서워도 ‘엄마! 그거 싫어! 그만해!’ 하며 똑같이 소리 지를 수 없다. 내가 화내면 그건 지금 네 살에게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국 약자가 쥘 수 없는 패를 가지고 협박하는 꼴이다.


내 말을 의도하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순간순간 의지적으로 가지려 해 보았다. 여러 번 해보니 화가 사그라들고 아주 작고 어린 네 살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말을 잘 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미숙한 아기가 서 있었다. 도대체 이 작은 아기에게 무엇을 바란 걸까.


기준을 다시 세워야만 한다. 엄마인 나는 우리 집 네 살에게 어떤 기준으로 제한을 두어야 할까. 어떤 방법으로 제한을 두어야 할까. 아직도 매 순간이 숙제다. 멋들어지게 통제도 잘 해내는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그건 이미 물 건너간 것 같다. 그나마 네 살과 잘 지내는 서른넷이 되기 위해서, 제한을 주는 순간마다 다른 누구보다 네 살의 마음을 가장 1번으로 헤아려주자, 다짐한다. ‘나’를 무시한다고 넘겨짚지 말고. 애를 왜 저렇게 키우나 생각할 것 같은 ‘남’ 시선 의식하지 말고.


무엇보다 계속해서 건강을 챙기고 싶다. 남아있는 체력으로 마음도 넓힐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제한도 수월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세게 치고 싶은데 부드럽게 쓰다듬으라고 하니 절제해보는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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