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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순 Dec 11. 2023

데미글라스 소스 속 과일처럼

경양식 돈까스와 크림수프


언제부터였을까. 두툼하니 육즙 흘러내리는 것이 눈으로도 보이는 일본식 카츠가 유행하면서, 고기를 두드려 얇게 펴서 튀겨낸 옛날 경양식 돈까스가 더 희귀해진 것이. 물론 시판 소스를 뿌린 얇은 옛날식 냉동 돈까스는 분식집이나 호프집 등등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그런 거 말고 그때 그 시절 특식으로서의 경양식 돈까스를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밀가루와 버터로 루를 만들어 걸죽하게 끓여낸 수프가 나오고, 직접 끓인 데미글라스 소스 듬뿍 얹어  마카로니 샐러드와 함께 무거운 사기 접시에 차려는 그런 돈까스.

그런 돈까스가 먹고 싶어 수원의 한 경양식집을 찾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40년이 다 되어가는 전통을 자랑하는 경양식 집으로, 입구에는 명장의 증명인 인증서가 붙었다. 여전히 대기 손님이 줄을 길게 늘어서는 인기 맛집이라고 하여, 오픈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는데, 가게 정비를 기다리고 있자니 아직 건물 밖임에도 불구하고 진동하는 돈까스 소스 냄새에 기대감이 고조된다. 같은 자리에서 몇십 년을 반복해 왔으니, 단순히 소스를 끓이는 냄비에서 피어올라오는 것뿐만 아니라 벽 구석구석, 타일 구석구석 스미고 스며들어 그 농도가 한껏 진해졌으리라.



크림수프. 땅콩버터의 단 맛과 고소한 맛이 살풋 느껴진다.


드디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움직일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나는 가죽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먼저 수프가 차려졌다. 인당 1개씩 공평하게 배분되는 수프의 생김새는, 흔히 볼 수 있는 레토르트 수프와 다를 바가 없다. 건더기는 따로 없지만 점성 있는 말갛고 뽀얀 수프에 후추만 톡톡 뿌려 한 술 떠보면, 일반 크림수프보다는 다소 묵직한 온기가 온몸에 퍼진다. 살짝 고소한 단 맛도 느껴진다. 이미 매스컴을 많이 탄 집이라 그런가 그 비기는 이미 공개되어 있었는데, 땅콩버터를 넣으신단다. 희말간 그 빛깔에서는 전혀 눈치챌 수 없었지만 왠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층 더 고소하고 더 달게 느껴진다.


왕돈까스. 오래 정성들여 끓여낸 데미글라스 소스가 일품.


달각달각 수프 그릇이 비어갈 때 즈음 때맞추어 돈까스가 등장한다. 빵가루 파삭하게 입혀 튀겨 낸 돈까스 세 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아까 밖에서부터 냄새로 존재감 드러내던 데미글라스 소스는 아낌없이 흠뻑 끼얹었다. 마카로니샐러드에는 손으로 껍질 벗겨 툭툭 튿어냈을 귤도 들어갔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으로 맛을 더한 단무지도 함께 차려졌다.

손으로 두드려 질기지 않게 얇게 편 돈까스도 깨끗한 기름에 신선한 빵가루를 입혀 잘 튀겨내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것이 맛있었지만 역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데미글라스 소스였다. 사골 국물을 베이스로 과일을 비롯한 서른여 가지의 재료를 넣고 12시간을 끓인 다더니. 겉으로는 그저 오렌지빛을 띠는 묽은 소스일 뿐인데, 딱히 특출 날 것도 눈에 도드라지는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소스일 뿐인데, 그 안에 단단하게 농축된 시간과 기술은 눈으로 포착되지는 않지만 혀 끝에서 어여쁜 꽃을 피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대기손님은 더 많아져 있었다. 1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식사를 할 수 있을 듯해 보였다. 데이트하러 나온 연인들, 아이를 데리고 온 외식을 나온 가족들 모두 표정은 밝아보였다.




자주 먹을 수 없어 기념할 만한 날의 특식이었던 돈까스는 너무 흔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아져 버린 시기를 지나, 이제 도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 되었다. 이렇게 멀리 찾아오거나 오랜 기다림 끝에야 맛볼 수 있으니 말이다. 수프 속 땅콩버터처럼, 데미글라스 소스 속 과일처럼, 그리고 경양식 돈까스처럼. 눈에 띄지는 않지만 우리의 주변에 진득이 녹아 나있는 것. 어쩌면 특별한 것들은 모두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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