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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디 Jul 26. 2017

과거의 청춘이 현재의 청춘에게 부끄러움을 묻다.

영화 '동주' 리뷰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오."


고백하건데, 국문학도로 공부하면서 '윤동주'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되레 일제강점기 '이육사'의 시를 공부하며 울컥하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했다. 국문학을 공부할 때 꼭 나오는 논제. "윤동주는 과연 저항시인인가?"에 대해 '아니다'는 견해를 고수하곤 했다. 휴머니즘과 인간애를 작품 속에 훌륭하게 녹여낸 것은 맞지만, 미약하게 나오는 '부끄러움'이라는 시대정신이 일제강점기 속 '저항'을 담아내기엔 부족하다고 의견을 더했다.


영화 속, 지금의 내 나이를 살아가고 있는 윤동주는 송몽규에게, 아니 마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이념과 사상을 위해 문학을 매체로 이용하고, 그 숭고한 가치를 팔아버리는 것. 그게 혁명이니?" 그 장면에서 잠시 멍했다. 총대신 펜을 들기보다, 총을 드는 것이 더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던 나에게 윤동주의 한 마디는 부끄러웠다.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꺼이까."

"동주가 시를 사랑하는 만큼, 몽규도 세상을 사랑해서 그래."



윤동주의 부끄러움이 세상에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송몽규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송몽규의 그림자가 되어줬던 윤동주.

윤동주의 빛이 되어줬던 송몽규'


불평등을 타파하고, 국가의 존립을 위해 주권을 되찾고자 했던 송몽규. 윤동주와 이종사촌 지간이지만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이들이었다. 문학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규하하려는 윤동주와 달리, 송몽규는 급진적인 계몽과 개혁을 통해 독립을 추진하기를 원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송몽규. 그는 강렬하게 빛나는 태양을 닮앗다. 반면 내성적이고 성찰적인 면모가 강했던 윤동주는 그의 빛에 가려진 그림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태양은 너무나 뜨거워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많은 이들에게 빛을 내려주지만 다가갈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림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들과 가까이, 가장 아래에 존재하며 그들을 어루만져줄 수 잇는 것. 당시 신춘문예에는 송몽규의 콩트가 당선됐지만,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윤동주의 작품이 읽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윤동주는 그렇게 자신만의 방법으로 암흑같은 시대를 저항하며 살아갔다. 아니, 살아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의 정신적 지주이자, 멘토이자 인생의 선배였던 정지용. 윤동주는 정지용을 만나 '부끄러움'에 대해 묻는다. 일본 유학을 권하는 정지용에게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해가면서까지 일본에서 공부하는 게 부끄럽다 말한다. 그리고 정지용은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부끄럽지... 부끄러운 일이지."라는 말을 반복한다.


앞에 언급했다시피 그의 시에 켜켜이 쌓인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저항정신이라고 평가하기엔 미약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일이 부끄럽다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지녀야 할 수 있는지 새삼 다시 생각해본다.


과거의 청춘이었던 윤동주는 감히 송몽규처럼 확고한 신념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고, 이러한 시대에 시를 쓴다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고, 그 시가 쉽게 쓰여져서 또 다시 부끄럽다 말햇다. 지금 이 시대, 청춘을 살아가는 나는 과연 부끄러움을 아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하겠다.


나라는 일본에게 역사를 팔았고, 대학은 정부에 인문학을 팔았고, 돈이 신념보다 우선시 되는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부끄러움을 안다고 차마 말할 수도 없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부끄러움에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애국심 마케팅. 개인적으로 가장 혐오하는 영화 마케팅이다. 영화 '명량'처럼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와 연출이라 하더라도 '애국심 마케팅'으로 포장된 영화는 껄끄러웠다. 하지만 영화 '동주'는 조금 달랐다. 애국심으로 포장하여 독립지사 '윤동주'를 노래하지 않앗다.


이준익 감독은 영리하게도 윤동주의 '청춘'을 드러냇다. 좋아하는 여인앞에서 수줍어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부끄러워하고, 어두운 시대에 울컥하기도 하고, 친구의 성공에 시기하기도 하는 청춘 윤동주를 그려냈다. 그의 시도에 나는 박수를 보낸다.


대한민국에서 문학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윤동주는 '저항시인 중 1명' 혹은 '부끄러움을 노래한 시인'이라는 가벼운 인식만이 존재한다. 그가 짧게 살고 간 28년의 시간을 온전히 느끼기 보다 '부끄러움과 윤동주'를 주입하여 배우는 경우가 많앗다. 왜 그가 부끄러움을 노래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한 채.


이 영화를 보면 윤동주와 함께 청춘을 보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강하늘이 잔잔히 낭독하는 그의 시에 모르는 새 눈물이 난다. 그의 청춘이 미약해서, 나약해서, 하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아서.


이 영화가 흑백필름이라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시대 속, 한 줄기 빛이 되어준 그의 인생이 더욱 돋보일 수 있는 기법이어서. 오늘 밤, 윤동주 시집을 읽고 자야겠다. 나의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면 잠에 들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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