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1. PEACE 03화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거절이 미덕은 아니잖아요

by 황사공


피곤한 아침이다. 걷기로 인한 근육통에 코골이로 인한 난리통이 더해져 아침임에도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뭉쳐있다. 하지만 숙소에서 계속 쉴 수는 없기에, 같은 방을 사용했던 일본인 케이코와 함께 길을 나선다.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일본인 아주머니였지만 어제의 그 하룻밤 사이에 꽤나 친해졌다. 동양인 자체가 드문 이 길 위에서는 같은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DSCF1016.JPG


뭉게구름이 너무 아름다운 청명한 아침이다.


케이코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쉼 없이 대화를 하며 길을 걸었다. 길을 가다가 똥이 보이면, 영어로는 shit, 한국어는 똥, 일본어는 훙이라는 식의 시답잖은 대화를 였지만, 우리는 함께 걸었고 나름 즐거웠다.


아주 왜소한 체격의 케이코상은 본인의 덩치만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왔다. 배낭을 메고 있으면 그녀의 몸은 거의 온전히 가려지고 너무도 빈약한 두 다리만 보인다. 커다랗고 빨간 등껍질을 메고 있는 한 마리의 거북이 같은 느낌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산티아고를 오면 온 집의 살림을 다 싸서 온다는 소문이 괜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케이코상은 정말 모든 것을 싸온 듯했다. 하지만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언어도 생김새도 낯선 곳에 와야 하기에 준비를 철저히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곳에 올 수 있게 해주는 용기는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단어장이 있었다.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로 된 단어장을 직접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단어장을 뒤져가며 모두와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뻘은 되어 보이는 케이코의 철저한 준비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우리 엄마라면 이 길을 혼자 떠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젊디 젊은 나 역시 이 길을 오면서 수많은 난관에 부닥쳤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훌쩍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케이코가 대단해 보인다.


DSCF1015.JPG
DSCF1024.JPG



어제저녁을 함께 한 까뜨린과 실까도 만났다. 아마 오늘의 가장 느린 순례자 4명이 바로 우리가 아니었을까?

발에 물집이 아주 심각하게 잡혀있는 까뜨린과 실까는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발이 꽤나 아파오고 있었기에 빨리 갈 수가 없었고, 가방이 너무 무거운 케이코상도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느렸지만 함께였기에 즐거웠고 외롭지 않았다. 앞서가는 까뜨린을 바라보며 걷고, 뒤에서 따라오는 케이코상을 기다리며 걷는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된 사람들이지만 이 낯선 길을 함께 걷고 있음에 감사하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산길이 끝나고 아스팔트 길로 접어들었다. 발이 꽤나 심각하게 아파온다.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로 인해 발은 신발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듯하다. 도저히 이 등산화를 신고 길을 계속 걸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등산화가 아닌 신발은 플립플랍 하나가 유일했다. 더 철저히 준비하지 않은 내가 원망스럽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스팔트를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플립플랍으로 갈아 신기로 결정했다. 아니 도저히 등산화를 신고 걸을 수가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걷는다는 것이 이토록 큰 고통이 될 수 있음을 생전 처음으로 깨닫는다.


DSCF1021.JPG
DSCF1036.JPG



정말 살 것 같다. 왜 진작에 저 신발을 벗어던지지 못했는지 한심할 지경이다.


왜 우리는 플립플랍을 신고 카미노를 걸으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걸까?
당연히 고어텍스 재질의 등산화를 신고 걸어야만 한다고 누가 소문내고 다니는 걸까?


나 역시도 그 고정관념 때문에 플립플랍을 신고 걷는 것을 결정하기까지 꽤나 망설였다. 뼈가 으스러질 듯 고통스러웠으면서도 말이다. 뒤꿈치가 다 까지고 물집이 다 짓뭉개 져도 등산화를 신고 고통스러워하며 걷는 수많은 순례자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것조차 순례길의 일부라 생각하는 그 믿음은 돌이켜 생각해 봐도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도 다를 바 없는 듯하다. 나에게 맞지 않는 직장에서 견뎌내고 버텨왔던 나날들, 내 몸은 고통으로 망가지고 괴롭다 울부짖고 있는데도 모른 척하고 꾹 참아왔던 시간들이 지금과 다른 게 무엇일까? 사는 건 다 이런 것이니 참아야 한다 말하며 각자의 인생을 참아내던 내 주변의 사람들과 지금의 이 순례자들의 모습이 무엇이 다를까?


이제라도 그런 고정관념을 깬 나의 선택이 기특하다. 자유를 찾은 열 개의 발가락을 바라 보기만 해도 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웃음이 난다. 이게 뭐라고 또 이토록 행복해지는 것인가. 카미노는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법을 배우게 해 주는 길인가 보다.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플립플랍을 신고 있는 나의 발을 보고선 걱정 어린 시선으로 괜찮냐고 묻는다. 발이 아파 갈아 신었다고, 이게 훨씬 편하니 걱정하지 말라 대답한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았고 진정으로 행복했다.




한참을 걸었다. 덥고 힘들고 배고프다. 이렇게 길이 길고 지루하게 이어질 줄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먹을 것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오전 내내 어디선가 마주치곤 했던 케이코, 실까, 까뜨린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뜨거운 스페인의 태양 아래 혼자 남겨진 기분이다.


가방 속에 로마에서 사 온 초콜릿이 있는 걸 생각해냈다. 쉴 자리도 마땅치 않아 한참을 걷다가 꼬불꼬불한 산길 중간에 살짝 자리를 잡았다. 그늘을 찾기도 힘들어 풀잎의 그늘이 살짝 드리워져 있는 돌멩이 위에 앉아 초콜릿을 꺼내본다. 다행히 녹진 않았다.


DSCF1028.JPG


90% 카카오 초콜릿 따위... 다신 사 먹지 않겠다. 절대. 원래 다크 초콜릿을 좋아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특히 기운 빠진 날 당분 보충을 위해서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맛은 없지만 안 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무런 맛도 없는 크레파스 같은 초콜릿을 우걱우걱 씹어 삼키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쩜 이렇게도 그늘이 없는지.. 내 발이 움직일 때마다 바짝 마른땅에서 노란 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1139E93E4ED5B27423143D Irre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코 남매를 만났다. 사실 말이 안 통해서 대화는 별로 못 나눠봤지만, 이름이 프란체스코, 안나마리코, 에츠코 여서 그냥 코 남매라 혼자 부르고 있었다. 특히 프란체스코는 간달프 같은 느낌이 드는 마법사처럼 생긴 할아버지였는데, 삶을 오래 살아온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인자한 미소를 늘 짓고 있어 특히 좋았다. 세 분은 이 마을에서 쉬어가려고 알베르게의 씨에스타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다음 마을인 팜플로나 까지 갈 예정이라고 말을 하고, 가려고 하는데 자꾸 세이요 세이요 라고 하신다.


세이요가 뭐지? 자꾸만 나에게 문을 두드리고 세이요 라고 말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신다. 뭔 말인지 잘 못 알아 들었지만 일단 문을 두드리고 세이요 라고 말했다. 세 분이 몹시 좋아하신다. 알베르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리고 내 크레덴셜에 도장을 찍어준다.

도장 - stamp - sello

세이요는 도장이었다. 새로운 단어를 또 하나 배웠다. 이다음부터 나는 "세이요, 뽀르빠보르 ~ Sello, Por favor "라고 공손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친절한 코 남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혼자 길을 나섰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지칠 법도 한데 피곤하지도 않았고, 코 남매를 만나고 세이요를 배운 것도 너무 즐거웠다. 먼지투성이인 발가락을 보고 혼자 또 웃으며 길을 걷는다. 누가 나를 보았다면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으리.


12261C424ED5B4492204FA


두리번거리며 마을을 걷다가 마주쳐 오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홀라 ~ 인사를 하고 나니 할아버지가 영어로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을 하고 왠지 멋쩍어 팜플로나 이쪽으로 가냐고 물어봤다. 이쪽 맞다며 자기가 함께 가 주겠다며 나와 함께 걸으며 산티아고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산티아고에 도착하거든 자신을 위해 꼭 기도를 해 달라 하신다. 만나서 반가웠다고, 그리고 행운을 빈다고 얘기를 해 주시길래 답례로 나도 스페인어로 인사를 드린다.


"무초 구스또, 부에나 수에르떼 ~ " (만나서 무척 반갑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
"부엔 카미노"

처음 본 사람에게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 주는,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작은 호의가 적어도 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순간이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눈을 마주치고 한 번 웃어 주는 것,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예전에는 왜 그렇게 하기 힘들었을까?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 빵집과 슈퍼마켓이 보여 들어가서 뭘 좀 살까 고민하다가 어쩐지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아 그냥 계속 걷기로 했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계속 내 몸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듯하다. 그렇게 마을 끄트머리를 지날 때쯤, 갑자기 누군가 나를 부른다.

'응? 여기서 날 부를 사람이 없는데?'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고 찾아보니, 어제 만났던 포르투갈인 루이스가 근처 바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살짝 뒤돌아 갔다. 루이스는 처음 보는 예쁜 순례자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맥주 한잔하고 가라는 그의 권유를 지금은 걷는 걸 멈추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팜플로나에서 보자고 얘기하고 먼저 길을 나선다.


루이스는 반짝이는 예쁜 눈을 가졌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자도 눈이 참 예뻤다. 어쩜 속눈썹도 길고 눈이 저렇게 깊을 수 있을까? 신기하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온다. 그 둘을 만나는 바람에 무엇인가의 흐름이 끊겨버린 건지 갑자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다리도 갑자기 아파오고 너무 쉬고 싶었다. 거절은 했지만 내 몸은 시원한 맥주 한잔을 원하고 있었나 보다.


길 가에 있는 벤치에 잠깐 앉았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도로길래 그냥 드러누워버렸다.


20441B3E4ED5B8183213B9


누워서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예쁘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오고 그늘은 시원하고 상쾌하다. 내 배낭은 좋은 베개였고, 바람은 좋은 이불이 되었다. 이대로 한 숨 자고 싶다.

참 이상한 일이지, 어쩐지 루이스와 그 여자애가 계속 신경 쓰인다. 내 뒤에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자꾸 뒤따라 올 것 같아 조바심도 느껴진다. 편안하게 누워 쉬어야지.. 싶다가도 그들이 나를 지나갈까 봐 계속 의식하느라 신경이 쓰여 마음이 불편했다. 안 되겠다. 다시 길이나 걸어야겠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다시 걸었다. 그리고 아무리 뒤를 돌아봐도 그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괜한 걱정. 그리고 또한 그들이 따라온들 어떠하리. 정말 바보 같기 그지없다.


깨끗한 도로를 따라 한참 걷다가 갈림길을 만났다. 화살표는 두 군데로 다 나 있었다. 팜플로나 성당의 모습이 저 멀리 보이고 있었기에 왠지 가까워 보이는 오른쪽 길로 걷기 시작했다. 그 길의 중간에는 서민들이 사는 듯 한 낡고 허름한 아파트가 하나 있었다. 골목길에는 꾀죄죄한 꼬마들이 길가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꽤나 사나웠다. 이런 눈빛을 만난 건 예전 필리핀 여행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아파트 난간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혼자였고, 괜스레 두려웠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당당한 척, 무섭지 않은 척 길을 지나갔고, 오토바이를 정비하고 있던 한 스페니쉬에게 팜플로나가 이쪽 맞냐 물어봤다. 이쪽으로 쭉 5분만 더 가면 팜플로나가 나온다고 친절하게 말해준다. 그 얘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그 아파트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순례자이고 저 사람에게 말도 걸었으니 해코지는 하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뒤통수가 계속 따가운 듯한 느낌이다.


문득 낮에 만난 친절한 스페인 아저씨가 떠올랐다. 작은 친절과 작은 호의에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며 감격하던 아까의 나는 어디로 가고 알지도 못하는 낯선 아이들과 사람들의 눈빛에 두려움에 떠는 내가 나타난 걸까?


한국에서는 밤에 길을 혼자 걷다 누가 나타나면 혹시나 나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 늘 두려움에 떨곤 했다. 여행 중에는 집시나 흑인들만 보면 혹시 내 가방 가져갈까 싶어 나도 모르게 가방을 움켜쥐곤 했다.

나도 모르게 겉모습만 보고 피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해 보이고 사나워 보이는 사람들. 각종 사건 사고의 피의자로 쉽게 지목되는 류의 사람들. 어쩌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커다란 편견일 수 있지만 이미 그 속에 길들여져 있는 나는 절로 그들을 피하곤 했다. 겉만 보고 섣불리 내려버린 판단들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님을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내가, 너무 가난해 보이는 그들이,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이 어쩐지 조금 슬프다.


DSCF1065.JPG
1976923B4ED5C5C8228DD7
DSCF1066.JPG



커다란 돌다리를 건너니 팜플로나가 나왔다. 왼편에 있는 작은 알베르게에 들렀는데, 이미 그곳은 다 찼다고 한다. 호스트가 친절하게 시립 알베르게의 위치를 알려준다.

시립 알베르게는 엄청 컸다. 그리고 새로 리모델링이 되어 시설이 굉장히 깨끗했다. 침대 번호를 받고 침대를 찾아 올라가다가 한국인 락 오빠도 만나고 까뜨린도 다시 만났다. 반가웠다. 그리고 한국인 여학생 세명도 만났다. 말라가에서 유학 중인 그녀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순례길에 올랐으며 팜플로나에서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이십 대 초반의 어린 학생들, 기특해서 다음에 밥 한번 사 주겠노라 얘기하고 헤어졌다.
씻고, 빨래를 하고, 커다란 공동숙소를 돌고 돌아 내 침대를 찾아가는 길에 한 여성 순례자가 날 불렀다.

"꼬모 에스따르?" (괜찮아요? )
"무이 비엔" (아주 좋아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단어 중에 하나, 오며 가며 자주 마주쳤던 중년의 순례자였다. 그녀는 한결같이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해 대며 나에게 하트가 예쁘게 박혀있는 플립플랍을 주었다. 웃으면서 뭐라 말하는데 사실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플립플랍을 신고 걷는 나에게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서 자신의 플립플랍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고맙게 받았다.

"무챠스 그라시아스 ~" (정말 감사합니다!)

거절이 미덕이라 배우며 자란 우리는 이런 이유 없는 선물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유 없이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이 곳에서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에 고맙게 받아들인다. 호의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고마워해 주는 것, 그 이상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말이다.



어제저녁을 함께 하지 못한 게 미안해 오늘 저녁을 함께 하기로 약속을 한 락과 함께 슈퍼마켓에 갔다. 락이 특별히 한국식 저녁밥을 해 주기로 했다. 나보다는 나이가 많을 것이 확실한 락이 알아서 이것저것 분주히 골라 담는다.


한국인 락은 신기한 사람이다. 처음 본 것은 이틀째의 카미노를 시작한 론세스바이어스 였다. 나는 히데오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있었고, 이마에 두건과 헤드램프를 감은채 2층에 앉아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동양인을 발견했었다. 워낙 스타일이 특이해 일본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먼저 출발한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급해 얼른 씻으러 가던 나에게 락 오빠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었다. 오래간만에 한국인을 만나니 너무 반가웠었다.


그는 전형적인 한국인 남자와는 조금 달랐다. 요가를 했고 또 요리를 좋아했다. 신기하다. 하지만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두 비밀이었다. 본인이 밝히길 원치 않아서 다시 묻지 않았지만, 대화 내용으로 짐작해보건대 뭔가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하긴, 이 곳에 있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평범과는 먼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이번이 두 번째 카미노인 락은 나의 지도에 어디가 좋고 어디가 나쁜지 표시를 해 줬고, 이런저런 유용한 팁들을 많이 알려주었다. 오래간만에 뭔가 의지해도 될 듯한 사람을 만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주방에서 락과 함께 한참 요리를 하고 있는데, 켄따루와 후미야가 올라왔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려는 여러 순례자들과 함께 떠들썩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주방에서 갓 만든 모두 따끈한 밥에 모두 행복해했다.


DSCF1069.JPG
186680374ED5CA091331E6


너무도 맛있는 고기 야채볶음, 어쩐지 고기도 야채도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식사에 빠질 수 없는 와인 한 병까지! 오늘 또한 너무 행복한 저녁이다.


저녁 후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숙소에 돌아왔다. 그리고 또 우연히 루이스를 만났다. 카미노가 끝나고 포르투갈을 여행할 예정인 나에게 그는 아주 상세하게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준다. 그는 오늘도 몹시 친절하다.
포르투-리스본-세비야로 갈 나의 일정을, 포르투-리스본-에보라-세비야로 변경해주며, 자신의 집에 나를 초청했다. 넘치는 친절에 익숙지 않은 나는 조금 당황스러워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고 넘어가고 만다.

루이스는 예전에 카메라 감독이었고, 영화나 광고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일을 접고 자연 속에서 쉬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자연 속에서 전기도 수도도 없이 살고 있다는 이 사람, 뭔가 특이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의 삶이 궁금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걸 물어보는 것이 실례가 될 것 같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낮에 함께 있던 여자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 갔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이상하게 이 사람에게 그런 질문은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이상하다.

루이스는 친구들과 술을 먹는다고 주방으로 올라가고 나는 내 침대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켄과 후미야가 내일 아침에 함께 걷고 싶다고, 기다리겠노라고 말을 했다. 굳이 왜 같이 가자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대충 그러라고 대답하고 침대에 누웠다. 발이 불난 듯이 뜨겁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혹사당한 적이 없었기에, 발이 많이 놀란 것 같다. 고작 나흘을 걸었을 뿐인데 말이다. 좁은 침대에 누워 한참을 스트레칭을 하고 발 마사지를 했다. 위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놀라지 않게 조심조심하면서 말이다.

걷는 것은 괴롭고 힘들지만, 그래도 하고 말고 고민할 것도 없이 무조건 걸어야만 할 것 같다.

생각보다 더 많이 고통스럽지만 내일도 나는 걸을 것이다.

걷는 것 밖에 할 것이 없는 이 길, 그리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좋은 사람들.


오늘 나는 이 길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





keyword
이전 02화고통을 대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