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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바람 Nov 08. 2023

김장배추, ‘돈’

고랑과 고랑에 하늘빛이 가만히 내려앉았지만, 여름빛에 제대로 땅이 숨을 쉬지 않아 땅은 거칠게 굳어서 부드럽지 않았다. 이 땅은 원래 논이었다고 한다. 논이었던 땅에 흙을 덮어 밭이 되었고, 우리가 집을 지으면서 다른 흙이 덮어져서 땅도 아직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질다. 비가 오면 물이 안 빠지고, 가물면 흙이 굳어 도저히 저기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을까 싶다. 


땅을 갈고 그대로 굳어가는 흙에서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농부의 말을 따라 그대로 무를 심고, 배추를 심었다.





모종 위에 상토가 살짝 덮여야 한다는 사실을, 한참이나 나중에 알았지만 그래도 허리를 펴지 않고 열심히 땅을 쳐다보고 심었다. 다행히 무는 자동으로 씨를 뿌렸으며 배추 모종은 정성을 다해 심었다. 어떤 마음으로 땅을 보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땅에 심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추를 심으면서 가장 먼저 고민하게 된 것은 ‘돈’이다. 

살아가면서 ‘돈’에 대한 고민은 단순하게 ‘어떻게 하면 벌지’,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나?’를 고민했을 뿐이다. '돈'은 불안도 주고, 만족도 주고, 양심의 경계도 주었다.


노동의 대가를 받고, 소비를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이 시스템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결국, 나는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인간인 셈이다. 자본주의적인 삶을 당연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돈’의 시스템 안에서 노동하고 소비하는 삶을 살았다. 


 자본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또 다른 소비를 위해 다시 노동하는 것에 있다.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


지금 땅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서 ‘돈’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을 품게 되었다.

300여 평에서 밭농사가 아주 잘 된다 해도 거기서 나오는 것으로 배추가 나에게 돈이 될 리 만무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땅을 보고, 배추가 하루하루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삶이란 그렇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도시에서 일할 때 사회적이다는 곧 노동력의 부가가치를 의미했으며, 지금까지 밥을 먹여 주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평생을 을(乙)로 살아가고, 노동자로 살아가고, 자영업자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일을 하면서 얻은 ‘돈’으로 저축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진 것이 생겼으며 그것을 지키려고 두려워했다. 미래에 돈이 없으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배추 한 포기를 심으면서 나는 돈의 가치에 대한 생각으로 혼란스럽다. 그저 소비를 위해 벌었고, 소비를 좀 더 풍족하기 위해 나는 비굴할 때도, 억울할 때도, 억척스러울 때도, 아팠을 때도 참았던 것 같다.

일종의 성공이라고 적어도 안전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만족감으로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살아왔던 세상, 맞는 것일까?



‘다른 돈은 다른 세상을 가능하게 한다’. 


현실적이지 않지만, 다른 세상을 가능하게 할 꿈 꾸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에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다. 잠시나마, 허영심으로 그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잠시 멈칫하는 동안 배추는 날로 커갔다. 웬만한 햇빛도 이겨내고 비를 기다리다, 이제는 비도 흠뻑 맞았다. 나의 혼란스러운 내면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저 밭에서 새로운 인생이 보인다면, 아니 지금 새로운 삶의 문턱에 있다면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싶다.

 


마음을 비우고, 이놈의 세상이 돈의 굴레를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만으로 땅을 대하고, 느낀다. 도시에서 살던 나의 기운은 오로지 여기서나마 잠시 쉬고 있다.


배추와 무, 총각무를 다 심고 나서 땅이 주는 즐거움에 잠시 푹 빠졌다. 곱게는 못 심었지만, 땅의 기운이 나에게로 조금은 도착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서울에서 살면서 초록을 보고자 항상 어디론가 나들이를 갔다. 이제는 집 앞마당이 다 초록이다. 초록의 권태가 걱정은 된다.  여기서 산책하려 하면 만나는 것은 온통 논과 하늘이다.

내가 이 하늘을 가지려고 이곳에 왔는데, 잠시의 권태로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쉬울 것 같다.



사진 솔바람


기어코, 이 순간 다른 돈이 존재할 것이라는 신뢰는 와닿지 못하고 있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심은 김장 배추와 무, 나의 일상에서 자라난 재료로 김장을 한다.


오늘의 하늘과 내일의 하늘이 다름을 알아채는 순간 권태로운 시골이 아니라, 그리운 도시가 아니라 도무지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다이내믹한 인생을 마주할 것 같다.


이런 순간마저도 무가 그 험한 땅을 뚫고 자라기 시작했다.

배추는 비를 맞고 넓적하니 옆으로 짙게 누웠으며, 연한 알타리 이파리는 그대로 솎아내어 샐러드를 만들었다. 


들어가는 것이라고는 사과식초와 소금 쪼끔, 올리브유와 토마토일 뿐인 샐러드가 맛난 것을 처음 느꼈다. 삶은 달걀 하나 예쁘게 썰어 넣어 단백질까지 곁들인 것은 신의 한수 같다. 

그 옆에서 같은 시기에 파종한 쪽파는 지금 예쁘게 잘 자란다. 지난주 비가 며칠째 내리는 바람에 풀 매고, 돌 주우러 밭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사이 비는 배춧잎을 자라게 했고, 벌레들도 몇 포기 포식했다. 권태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하루하루 다른 밭을 보니,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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