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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곰 Mar 10. 2020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읽기, 잠자기, 매일 해도 티가 안나는 집안일, 운전하기를 시작

지난 5주를 돌아보면 회사에 가지 않는 한 달이라는 시간은 약간의 타격과 상처를 받은 내가 회복하기에 부족하지만 꽤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상처마다 다르겠지만 의사 선생님이 잘 간파했던 건지 약이 잘 들었던 건지 그 모두였겠지만. 고민했지만 쉬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다.

 입사하고 한 달 정도 의욕이 넘쳐났던 것 같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잘 해내고 싶은 하녀 본능 같은 게 폭발했다. 그래서 보상 없는 열정에 화가 나기도 했고 포기한 후로 속수무책으로 무기력해졌던 것 같다. 올해 처음으로 완독한 책 이름이 기분이 없는 기분이었는데, 화가 나기는커녕 기분이 없는 기분. 딱 그랬다. 웃음이 없고 기분이 없는 기분 상태로 한 달 정도가 지났고, 이 업무와 내 적성에 대한 의구심이라고 해야 할까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에 지원한, 이 상황에 나를 몰아넣은 내가 너무 싫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죄책감에 몹시 불안했다. 공교롭게 내가 맡은 사업들은 사업비가 컸고, 주무관도 나도 이런 일이 처음이었고 나는 판단에 따른 무거운 책임이 두려웠고 그녀는 이렇게 늦어지는 상황이 무척 싫었던 거 같다. 갑의 입장에서도 일해보고, 을의 입장에서도 일해봤지만 결국은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쪽 일은 그렇지 않았던 거 같다. 실수가 프레임이 되고 그런 일들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갔고 그녀와의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육식동물 포식자 앞에 있는 초식동물의 마음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임신도 아니고 숙취도 아니고 급체도 아닌데 참을 수 없는 구역감에 회의를 하다가 화장실에 뛰어가서 토하기도 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공문 날아오는 공문을 열어보는 순간, 매일같이 여기저기서 안 되는 이유 같은 걸 늘어놓는 익숙한 전화번호가 화면에 뜨면 온 몸이 차가워져서 오한이 들고 내 몸을 돌던 피가 발밑까지 수직 하강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처음엔 반도 못 먹어서 점심 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국물 위주로 염분을 섭취해서 하루를 버텼다. 병가를 쓰기 바로 전에는 거의 한 입도 삼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먹는 일에 이렇게까지 흥미를 잃어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로 목구멍에 뭐가 단단히 걸린 것처럼 회사에서, 점심시간에는 도무지 넘어가지가 않았다. 10년 넘게 하루에 커피를 두 잔 이상 마셨고, 아니 한밤중에도 뜨거운 커피를 먹고 잠을 잘 수 있었던 사람인데 쉬면서 생각해보니 이 회사에 입사하고 3달 정도 커피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술도 거의 마시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그 당시 내 몸이 커피나 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휴가를 앞두고 날씬해지고 싶을 때는 꿈쩍도 안 하던 몸무게도 4kg나 줄어들었다. 판단에 자신이 없고 몇 번이나 읽어야 이해나 기억할 수 있었고  영화도 한 편을 끈김 없이 보기 힘들었고, 아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상대방의 의중에 맞는 말을 하기 어려웠고 실제로 친구와의 대화에서 크게 실수하기도 했다. 퇴근하면서 울었고, 일어나는 게 가장 힘들었고 출근 전에도 신랑을 안고 울었다. 야근하기 전에 눈물을 훔치는 날도 있었고 사람이 없는 아래층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삼키고 온 날도 있었고 급기야 죄책감 같은 게 봇물처럼 터져서 8시 50분부터 펑펑 울어버렸다.  

 3주째까지는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첫 주에는 잠을 많이 자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웃음도 없고 울음도 없고 기쁨도 없고 불안이 강했다. 원래도 잠을 일종의 도피처라고 생각했던 나는 3개월 간의 야근 시간만큼 쉬는 한 달 동안 몰아서 잤다. 전형적인 멜랑콜리 우울이 아니어서 그런지 나는 조조 각성이 없었고 저녁엔 일찍 자고 아침엔 일찍 일어나고 낮잠도 잤다. 하루 24시간 중에 15시간 정도는 잠만 잤던 거 같다. 핸드폰이 울리는 것, 누가 나를 찾는 것이 나를 탓할 일이 생긴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 달 내내 핸드폰은 방해금지 모드. 그래서 아침이고 저녁이고 할 것 없이, 거기다 코로나까지 겹쳐서 고요하게 잠을 많이 잤다. 꿈 없이 잤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서 유일한 회사 친구가 선물해준 모찌 촉감의 공룡인형이 큰 도움이 되었다.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으로 인형을 밤마다 끌어안고 잤다. 지금도 끌어안고 잔다.

 읽어보려고 몇 년 전에 친구에게 받아둔 심리학 개론서가 눈에 띄었다. 궁금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 건지, 어떻게 해야 나아지는 건지, 앞으로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개론서라 하면 공부할 때 읽는 책이니까, 그래서 몇 년째 몇 장도 넘기지 못하고 책장에만 있었는데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읽을 수 있었다. 일어나서 책을 읽고 낮잠을 자고 한 편의 영화를 집중해서 볼 수 있을 만큼의 집중력이 생겼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무언가를 길게 쓰거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그런 거까진 생각하기 어려웠다. 마음의 추가 49대 51로 기우는 쪽으로 일단 가보는 것. 거기까지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의외로 도움되는 건 집안을 쓸고 닦는 일이었다. 내가 쉰 지 3주째 되는 날부터 신랑이 출근을 하게 돼서 신랑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무기력이나 눈물이 찾아오진 않을지 걱정했지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양치를 하고 차가운 과채주스나 따뜻한 커피 중에 하나를 마시면서 몇 권의 책을 번갈아 읽다가 오후가 되면 집요정이 되어 열심히 집을 다듬었다. 설거지를 하고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정리를 하고 밀리지 않게 바로바로 쓰레기를 버리고 그러면 늦은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 신랑이 돌아온다. 치워도 치워도 티가 나지 않는 집을 보면서, 그러나 치우지 않으면 금세 머리카락이나 먼지가 나뒹구는 집을 보면서 내 마음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일을 잘하기보다는 일과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지, 내가 문제인지 조직이 문제인지 한 발짝 떨어져서 탐구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주일, 한 달, 세 달 그렇게 꼭 1년만이라도 채울 수 있었으면 하고, 매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올해는 눈이 오기 전까지 꼭 빗길에도 눈길에도 내가 가고 싶은 곳까지는 스스로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내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내가 힘들 때 나를 지지해준 고마운 가족들,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올해의 이 말도 안 되는 힘듬을 적어도 앞으로 몇 년 간은 만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 한 주를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하지만 힘들면 도망가도 괜찮아. 도망가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되니까. 크게 한 숨을 쉬면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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