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소쇄원瀟灑園
담양 소쇄원瀟灑園
모든 정원은 주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소쇄원은 다르다. 소쇄원의 주인은 자신을 위한 정원을 만들지 않았다. 이것이 소쇄원의 특별함이다.
백일홍이 줄지어 피어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렸던 지금의 담양 광주호 주변에는 호남 가사문학을 이끌었던 이들의 수많은 정자들이 즐비해있다. 관동별곡을 지은 정철의 송강정부터,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순의 면앙정, 그 밖에도 식영정, 환벽당, 독수정까지 이렇게 수많은 정자들 가운데 우리나라 최고라 불리는 정원, 소쇄원이 있다.
호남학파가 중앙 정치 무대를 주름잡던 조선시대 초, 자미탄 주변 정자는 수십 개였다.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가 이곳에 정원을 조성할 때, 그의 주변에는 정원을 지어 본 경험이 있는, 혹은 여러 정원들을 방문하여 나름의 안목이 있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이들이 많았다. 양산보 시절의 송순, 임억령, 김윤제, 김인후 등과 그의 아들 대의 고경명, 기대승, 정철, 김성원 등은 정원 조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소쇄원은 호남지역 집단 지성의 정원이라 할만하다. 소쇄원은 이렇게 많은 이들의 조언과 의견을 수용하여 만든 정원이다.
한국의 3대 정원을 누가 무슨 권위로 지정하겠냐만은 다른 정원들은 3대 정원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지만 소쇄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이라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다. 500년 역사 속에서 그 모습이 변치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하나의 이유겠지만, 그러한 정원은 경주 독락당獨樂堂과 봉화 청암정靑巖亭도 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소쇄원 구석구석의 사계절을 뛰어난 문장으로 남긴 [소쇄원 48 영시]도 이유겠지만, 명문으로 칭송받은 바로 옆 식영정息影亭에 비하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소쇄원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목판본이 있지만, 구례 운조루의 [전라구례오미동가도]나, 함안 무기연당의 [하환정도] 등 그림으로 남겨진 정원이 소쇄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래된 정원이라는 역사적 가치, 뛰어난 문장과 그림이 전해진다는 문헌학적 가치에 더하여 한국 정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기에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다. 한국 정원을 비롯한 세계 모든 정원의 완성도는 두 가지 잣대로 평가된다. 정원을 만드는 이유, 그리고 그 의도를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안목이다. 소쇄원의 조성 이유와 안목을 살펴보자.
소쇄원에는 3개의 주요 건축물이 있다. 주인의 거처지인 제월당霽月堂, 가까운 지인이 오랫동안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한 게스트룸인 광풍각光風閣, 그리고 계류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끽할 수 있는 대봉대待鳳臺 위의 작은 초정이다. 세 건축물의 이름은 정원 조성 의도를 알려준다. 제월霽月과 광풍光風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유학자인 주렴계周敦頤를 뜻한다. 주희朱熹의 스승이자, 조선의 유학자들이 사랑한 주렴계를 양산보 역시 좋아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말해주는 시에서 제월과 광풍의 뜻을 알 수 있다.
마치 비가 그치고 맑게 갠 날씨에 부는 바람과 밝은 달처럼
그의 인품과 가슴에 품은 생각은 고상하면서도 개운하고 깨끗하였고,
이름을 날리는 것에는 욕심이 없었지만, 자신의 뜻을 지키는 것에는 치밀하였으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였고,
홀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것을 자신을 돌보는 것보다 우선시하였으며,
볼품없는 이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친구들은 오랫동안 그를 가까이하였다.
- 주렴계에 대한 황정견의 시 (필자 재해석)
주렴계와 닮고자 했던 양산보는 시에서 나오는 개운한 바람과 깨끗한 달을 뜻하는 제월과 광풍을 차용하여 건축물 이름을 짓는다. 득이 될만한 재력과 높은 벼슬이 있어서가 아닌, 볼품없어 보이더라도 사람 자체가 좋아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고픈 이가 되는 것이 양산보의 꿈이었다. 소쇄원은 바로 그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정원이었다.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봉대는 그가 기다림의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봉황은 새 중에서 으뜸으로 뛰어나게 잘난 사람을 상징하기도 한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오직 오동나무 위에만 내려앉고 대나무 열매만 먹고사는 봉황을 위해 초정 뒤에 벽오동을, 그리고 정원 곳곳에 대나무를 심어 초정에 온 손님을 칭송하고 부디 오래 머물다 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소쇄원은 봉황같이 빼어난 이들이 볼품없는 자신을 찾아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정원이다. 이것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수많은 시들로 노래 불러져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애정하는 정원이 된 이유이다.
소쇄원의 전체 구성과 작은 디테일은 정원의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한 결과물이다. 그의 안목에 집단 지성의 목소리가 더해져 완성도 높은 정원이 만들어졌다. 울창한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 소쇄원으로 들어간다. 어둡고 고요한 공간은 긴장감과 기대감을 일으킨다. 갑자기 밝은 빛과 시원한 물줄기가 눈앞에 쏟아진다. 마치 공연 전 암전을 통해 집중도를 높였다가 극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효과이다.
소쇄원의 핵심 경관은 계류이다. 계류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곳은 대봉대 초정이다. 좋은 계절의 주말이면 초정에 들어가 보기 위한 긴 줄을 볼 수 있다. 진입로와 초정 사이에는 두 개의 지당이 있는데 작은 지당小塘은 초정 바로 옆에 있다. 초정에 앉아 노니는 물고기도 보고 계류의 물이 대나무 홈통으로 만든 길을 통과하며 초정 앞에서부터 두 지당을 거쳐 빠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계류에서 대나무 홈통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인위적으로 돌을 깎은 것을 알 수 있다. 교묘히 인공성을 드러내지 않고 자연을 증폭시키는 한국 정원의 특징을 여기서도 만난다. 때론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고 낚시를 하기도 한다. 이 작은 공간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담았다.
이상하게도 소쇄원 담장은 큰 지당을 감싸주지 않고 길가에 노출시켰다. 담장을 조금만 더 길게 만든다면 큰 지당까지 소쇄원의 영역으로 여겨졌을 텐데 어정쩡한 곳에서 담장은 시작된다. 소쇄원의 계류는 바로 앞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용수였을 것이다. 또한 산을 오르는 누군가가 필요한 물을 길으는 곳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정원을 만든답시고 생활용수를 가로챈다면 미움을 사게 된다. 큰 지당은 계류의 물을 편리하게 떠 갈 수 있게 만든 작은 저수지이다. 큰 지당은 정원의 한 요소이지만 개방시켜 놓고 누구든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담장은 어정쩡한 시작이 아닌 정확한 의도를 보여준다.
계류 다음의 소쇄원 핵심 요소는 담장이다. 일반적으로 담장이라고 하면 영역을 구분하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소쇄원의 담장은 일반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먼저 담장의 양 끝이 모두 뚫려 있다. 보통은 공간을 둘러싸는 것이 담장이건만, 소쇄원의 담장은 갑자기 시작하고 끝난다. 심지어 담장의 아래도 뚫려있다. 담장이 계류 위를 건너는데 그 아래에는 자연돌을 기운 두 개의 기둥이 담장을 받힌다. 누구든 이 사이를 통해 안으로 들어오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담장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쇄원의 담장은 두 개다. 먼저 오른쪽에 역'ㄷ'자 형태의 담장은 시선 차단에 목적이 있다. 대봉대 초정에 면해 있는 담장 뒤는 마을 사람들이 산을 오를 때 사용하는 길이다. 소쇄원으로 진입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성산을 오를 때도 이 길을 지난다. 그렇기에 소쇄원의 북쪽과 동쪽 담장이 없으면 귀한 손님들이 지나다니는 이에게 노출되어 구경거리가 돼버린다.
제월당 서쪽의 ‘ㄹ'자 형태의 담장은 요상하다. 담장을 굳이 이렇게 4번을 꺾어 돌아가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월당은 주인의 거처지이고, 광풍각은 귀한 손님이 오시면 며칠 묵어 가시는 게스트룸이다. 만약 담장이 제월당 서쪽에서 광풍각 서쪽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면 제월당에서 광풍각을 내려다보는 형국이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는 담장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담장이면 공간 구분 용도로 충분할 텐데 왜 두 겹의 담장이 필요했을까?
사실 효율적인 담장 배치는 위와 같다. 광풍각 뒤로 계단과 문을 만들면 제월당과 광풍각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지면서 동시에 담장 조성의 품도 덜 들어가고 무엇보다 간결하다. 효율적으로 담장을 배치하지 않고 굳이 4번을 돌아가는 담장을 만든 이유는 두 가지 담장의 차이점에서 알 수 있다. 동선이 다르다. 현재 소쇄원의 동선은 광풍각에서 나와 담장 밖의 계단을 오른 후 오른쪽으로 한번 꺾은 다음 다시 왼쪽으로 꺾어 문에 다다른다.
동선이 길다는 것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여기서 얻는 효과는 분명하다. 제월당의 주인이 손님을 맞이할 시간을 벌어준다. 소쇄원에 있으면 광풍각 안에 있는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밖으로 나와 있는 모습은 볼 수 있다. 담장 길이가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인 이유이다. 만약 광풍각 뒤에서 제월당으로 바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면 제월당의 주인은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해진다. 손님은 손님대로 주인을 분주하게 만들어서 민망하고 주인은 주인대로 손님을 기다리게 만들어 미안해진다. 효율과 신속함 보다 침착함과 안정감을 추구한 동선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계단은 아마도 무척 가팔랐을 것이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광풍각의 위치를 조금 더 남서쪽으로 뺐다면 제월당에서 너무 멀어져 손님을 적절히 케어할 수 없고, 입구에서 너무 가까워져 부담스럽다. 결국 이보다 더 나은 설계는 없다.
계류를 중심으로 대봉대와 그 뒤 담장의 축은 병렬을 이룬다. 하지만 계류에서 제월당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축은 미세하게 조금씩 조금씩 각도를 틀어 약 40도가량의 격차를 가진다. 제월당의 시선은 계류를 향하지 않는다. 대봉대 초정과 광풍각 그리고 정원 진입로를 바라보는 구도이다. 소쇄원의 조성 의도는 건축물들의 이름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체 공간의 설계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방법은 현대의 건축가와 조경가에게도 귀감이 될 만하다.
한국 정원의 특징을 자연스러움에서 찾는다. 누군가는 '자연스럽다'는 말은 디자인 특징이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라고 한다. 분위기가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스러운 것은 맞으나 이토록 치밀하게 기획된 정원에 디자인적 특징이 없다고 한다면 유럽의 기하학적인 선형과 장식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시간이 갈수록 깊이를 더하고, 의미를 알 수록 감동이 진해지는 정원과 부와 권력 가지고 당대의 모든 기술과 자원을 동원해 화려함의 끝을 보여주는 정원 사이에서 무엇이 더 낫다고는 누구도 판단할 순 없다. 그저 현실적 차이와 미적 감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검이불루俭而不陋 화이불치华而不侈를 치밀하게 기획하여 담아낸 한국의 정원, 소쇄원이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