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재樂善齋
'재齊'란 외진 곳에 한적하게 건립하는 건축물로, 숨어서 수신하고 은밀하게 처신하는 곳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 애매한 곳에 자리 잡은 낙선재는 역대 최연소로 왕위에 오른 헌종이 지었다.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들로 가득한 궁에서 외진 곳에 숨어 은밀하고자 했던 헌종의 낙선재로 떠나보자.
헌종의 정치적 무력감은 그의 증조할아버지, 정조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0살의 어린 순조가 왕위를 물려받는다. 어린 왕으로 인한 권력 공백을 외척 세력인 정순왕후와 김조순과 같은 인물들이 메꾸면서 조선은 부패한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는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을 바로잡고자 했지만 21살에 죽는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4년 후인, 44살로 순조 역시 운명한다. 그렇게 증조할아버지와 아버지, 할아버지를 연이어 잃은 어린 헌종은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왕실의 급작스러운 죽음 속, 망국의 시작에 놓인 조선을 어린 헌종이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팔다리가 모두 잘린 어린 왕의 즉위는 부패한 세력들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조대비 순원왕후와 대비 신정왕후는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끊임없이 다투었고, 이러한 왕실의 소용돌이 속에 어린 왕, 헌종이 있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양선이 출몰하는 등 국제 정서가 급변하는 시기에 헌종은 그 무엇도 자신의 손으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에게는 마음 기댈 곳이 간절했다. 후궁, 경빈 김 씨는 그런 그에게 정서적 피난처였다.
계비와 있을 집을 궁 안에 지은 왕은 헌종이 처음이었다. 낙선재를 지은 것이 헌종의 업적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일이다. 후사를 만들어 왕위를 물려주는 것 말고는 목소리를 내어 진행시킬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낙선재의 위치는 애매하다. 창덕궁도 아니고 창경궁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낙선재를 만든다. 이러한 애매한 위치는 마치 헌종의 정치적 입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할머니 순원왕후의 편도, 어머니 신정왕후의 편도 들 수 없었던 헌종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는 끼여있는 위치였다. 왕실과 동떨어진듯한 이런 애매한 곳에서 헌종은 경빈 김 씨와 시간을 보낸다.
낙선재 앞 넓은 공터는 원래 행랑마당이었다. 지금은 나지막한 경사로를 내려와 바로 낙선재로 들어가지만 원래는 여러 번의 문을 거쳐야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 번의 문을 거치는 것은 공간의 위계를 높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낙선재는 세 개의 건축물이 나란히 붙어 있다. 가장 왼쪽이 왕의 서재인 '낙선재', 그 옆에는 복을 내릴 테니 후사를 만들라는 의미의 '석복헌錫福軒', 그리고 이들 옆에는 태어날 후사의 적통성을 입증해 줄 조대비 순원왕후의 처소 '수강재壽康齋', 이를 모두 통칭하여 낙선재라고 부른다.
평면도로 볼 수 있는 건물의 구성은 낙선재를 지은 헌종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수강재와 석복헌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복도로 이어진 하나의 건축물이다. 보통 민가에서는 안채와 사랑채를 이런 식으로 이어서 짓는 경우가 많은데 낙선재와는 오히려 떨어져 있고 시어머니와 붙여 놓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붙어 있는 수강재보다 떨어져 있는 낙선재가 오히려 석복헌에서 가깝다. 헌종과 경빈 김 씨의 침소는 서로의 방문을 열면 연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적막한 밤이 되면, 낙선재와 석복헌 침실 사이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두 침실은 서로의 방문만 열면 바로 이어진다. 아무도 모르게, 어떠한 장벽도 없이 두 침실은 서로를 오갈 수 있도록 하였다. 낙선재와 석복헌은 후원에서 밀회를 하기 위해 만든 집이다. 이토록 낙선재를 지은 헌종의 의도는 낯 뜨거울 만큼 분명하다.
낙선재는 참 아름다운 집이다. 낙선재 창호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조선 최고이며, 누마루 아래의 빙열무늬 역시 화려하다. 조선 후기, 전돌 생산기술의 발전은 아름다운 귀갑무늬 담장을 탄생시켰고, 화계에는 작약과 모란 등의 꽃과 괴석, 그리고 석함을 두어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없다. 누군가는 궁에서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라고 하지만, 헌종은 어떤 사대부도 따라 할 수 없는 가장 화려한 민가를 완성했다. 창덕궁도 창경궁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의 구석에 이토록 화려한 민가를 만든 헌종은 정치적 무력감을 낙선재에서 만큼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낙선재가 완성된 지 채 3년도 되지 않아 헌종은 23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후사를 만들지 못해 왕의 정통성을 지키지 못한 경빈 김 씨 역시 궁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후 조선은 나락의 길로 접어들어 국권을 빼앗긴 후, 순종은 낙선재에서 살게 된다. 수강재에 거처하던 순원왕후도, 영친왕 이은도,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혜옹주와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까지, 모두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다 마지막을 맞이한다.
궁에 있는 여러 화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것이 낙선재이다. 북악산에서 이어지는 산맥은 낙선재를 지나 종묘로 이어진다. 창덕궁 내에서는 낮은 곳에 있지만 낙선재 앞으로는 건축물 없이 종묘로 쭉 내려가기에 낙선재 뒤, 화계 위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서울의 랜드마크, 남산타워가 마주 보인다. 이 도시 경치를 바라보며 조선의 마지막 왕가는 하나, 둘 씩 사라졌다. 낙선재의 좁은 입지는 조선 왕실의 정치적 입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이 넓디넓은 궁에서, 수많은 전각들을 뒤로한 채 낙선재에만 머물 수 있었던 조선의 마지막 왕족의 삶은 비통했다.
탁 트인 경관을 바라보는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 자리 잡는 것을 지나온 세월의 장면들을 말없이 담아 온 정자를 탓해본다. 주변이 모두 다 틔워져 있는 경치가 오히려,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외딴섬처럼 느끼게 한다. 정치적 무력감을 낙선재에서만큼은 느끼고 싶지 않았던 헌종의 바람과 달리, 조선의 마지막 왕가는 정치적 무력함을 낙선재에서 겨우 버텨냈다. 왕가가 보낸 마지막 시간이 화려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낙선재라서 그나마 위로가 된다.
한국정원의 가치를 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정원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쓰고 말합니다.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원에서 우리 문화를 느끼고, 해외에서 온 여행객의 일정표에 우리 정원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정원 문화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달빛 아래 너랑 나랑, 월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