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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Apr 26. 2024

사람 홀리기 딱 좋은 숲

[나의 안식월 이야기] 청암산 둘레길

따끈하게 데워진 소금빵과 커피를 들고 드디어 청암산으로 출발. 사실 나는 좀 출출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직 온기를 잃지 않은 소금빵을 먼저 한 입 베어 물었다. 원만한 사회적 활동을 하려면 미리 대비해야 한다. 배고프면 평소 고양이 같은 예민함이 사자급이 되니까.

      

바사사삭. 소금빵을 먹었는데 바게트 풍미가 난다. 뭐지. 이 녀석은. 한 번 더 바사삭. 역시, 이건 바게트다. 미니 바게트. 바케트를 닮은 소금빵이라.. 특이한데 맛있어. 이런 소금빵은 먹어 본 적 없는데... 추앙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군. ‘고독한 미식가’라도 되는 양 속엣말을 한다. 언니가 사과와 커피, 소금빵을 먹을 조식 자리를 봐두었다고 말했다. 다 먹지 말라는 말이다. 눈치 챙겨서 빵을 가방에 넣었다.     


“청암산 길은 다채로워. 지루하지 않아. 걷다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대숲. 어디선가 푸바오가 풀을 뜯어먹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대숲이었다. 그늘이 멋지게 드리워졌다. 한여름에도 걸을 수 있겠는 걸. 바닥은 고운 흙길.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오늘은 양말을 벗지 않았다. 숲 속 데크가 깔린 길을 만났을 때는 싱가포르 공원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 비슷한 길을 내가 어디서 걸어봤는데... 싶으면 싱가포르의 어느 숲이었다. 대문자 Y 모양의 나무도 만났다.



"이거 연대 나무네... 여기 만지면 연대 가나요? 큰아이는 홍대 가고 싶어 하니까 H 모양 나무 있으면 좋겠다. 기도하게."

"내가 여기 올 때마다 최자매 딸 잘 되라고 나무에게 기도할게."


말만 들어도 든든하다. 길은 대부분 오솔길처럼 넓지 않았는데 반대 방향에서 누가 걸어오면 걸음을 멈춰야 할 정도로 좁은 길도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넓어진 거야. 옛날에는 훨씬 더 좁았어. 정말 차마고도 같았어.”     


언니의 옛날이야기는 이 없다. 나는 어린 시절 헤어졌다 만난 언니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다. 그 시절이 손이 잡히는 것 같았다. 향긋한 꽃내음이 나면 언니가 먼저 말했다.


"찔레꽃 향기다. 어디에 찔레꽃이랑 수수꽃다리가 섞여 있나 보다. 향기 좋지?"


한참 더 걷는데 톤이 올라간 언니 목소리가 들렸다.      


“은경아, 이거 봐라.”   


호수의 반영이 끝내줬다. 연두가 같은 연두가 아니고, 연두와 노랑의 사이, 노랑도 노랑이 아닌 색의 콜라보. 전라도 사투리로 ‘허벌나게’ 이뻤다. 언니가 왜 지금 청암산이 아름답다고 했는지, 왜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고마웠다. 좋은 거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나라서.

숲속 조식 카페


언니가 말한 조식 먹을 자리가 나타났다. 아무도 없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네팔 어느 산장에 언니와 나 둘이 있는 것 같았다. 의자에 접시를 놓고 언니가 사과를 잘랐다. 접시라니.      



“동생이 사준 거야. 사과 먹을 때 나 이 접시 들고 다녀.”

     

비주얼만으로도 훌륭한 호텔 조식 한 상이 차려졌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역대급. 비가 오지 않고, 해가 나지 않아서 더 좋았던 날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살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살까 고민했는데 적당히 식은 따뜻한 커피가 목구멍을 강타하면서 몸을 적당히 릴랙스 시켰다. 뭐 하나 모자람이 없는 공간과 시간. 우리는 좀 더 걸었다. 거길 안 가면 안 된다고 언니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과연 그럴 만한 길이었다. 제주 곶자왈을 옮겨놓은 듯한 곳이었다. 버드나무가 가득한 곳. 사람 홀리기 딱 좋은 그런 숲. “쉬었다 가라”라고 말하지 않고 대번에 “자고 가”라고 말할 것 같은 요염한 나무들. 한동안 숲에서 서 있었다. 꼼짝 말고 서서 나무 안에 있었다. 하루 종일 있으라고 해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캠핑 의자야. 꼭 사야지. 안녕. 또 올게. 헤어지기 아쉬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내 뒷모습을 언니가 사진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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