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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Dec 17. 2023

암 의심소견을 받다.

추가로 주어진 삶

"꼭 병원 가서 검사받아보셔야 해요, 아셨죠?"


수화기 너머, 난생처음 통화한 상대였지만 짙은 당부 너머로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건강검진 후 얼마나 지났을까. 계속 같은 곳에서 전화가 와 받지 않다가 겨우 받았을 때였다. 물론 나도 보긴 했다. 건강검진 결과 내역에서 지난해와는 달리 이것저것 적힌 게 많다는 걸. 그렇지만 빈혈이야 웬만한 여성에게 있는 것이고, 부인과 관련 내용도 일전에 연이은 부정출혈로 부인과에 방문했을 때 어느 정도 인지한 바 있으니까.


"아, 그거요. 안 그래도 예전에 병원에서 검사해서 지켜보고 있어요."

어떤 검사였느냔 말에 얼추 설명을 드렸더니, 친절하지만 아주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그거랑 상관없어요. 아주 다른 거예요."


아.. 

그제야 머리 한 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얼마나 나 자신에 무심해서 자궁 안에 있는 혹과 자궁경부암 의심 소견을 같은 거라 여기고 있었나.


생리 주기 중이었기에 당장 병원에 갈 순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불안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원래 안전이나 건강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신경 쓰는 사람이었는데. 직장 동료들에게 얘기할 때에도 덤덤했다. 그저 의심소견일 뿐이고,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한데 듣는 당사자들은 덤덤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도 심각성을 인지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검사를 받는 날. 의심소견서를 제출하고 검사 기구에 착석했다.

초음파로 혹이 커지진 않았음을 확인받았다. 왜 지난 검진에 방문하지 않았느냐고. 회사 일로 바쁘단 핑계를 댔지만, 괜히 울컥했다. 그 안일함이 이 사태를 낳은 게 아닐까 하고. 다행히 혹은 더 커지지 않았지만, 보름 만에 확 커져서 오는 분들도 있으니 반년에 한 번씩은 꼭 검진에 오라는 말씀. 다시는 어기지 않을 것!


일부 조직을 떼어내서 진행하는 조직검사, 바이러스 검사, 확대사진촬영 등을 거쳤다. 조직검사는 피가 많이 나고 아플 것이라 했지만,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다. 다만, 며칠 내내 하혈하듯 피가 많이 나서 괜히 더 울적하게 했다. 그 핑계로 탕후루 몇 개 사서 혈당을 채우긴 했지만!


다음 날. 바이러스 검사와 확대사진촬영 결과가 나왔다. 모두 이상소견. 낙담했다. 당연히 아무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 이젠 실제상황이 될 수도 있겠구나, 어느 정도 체감됐다. 내가... 암? 나한테 암? 사실은 내 정신이 무너지기 전, 느끼진 못했지만 안에서는 이미 병이 시작되고 있었던 건가.


그렇지만 정말 정신이 무너져서인지. 슬픈 감각도,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하는 낙담하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물론 확실하게 암을 진단받은 상황이 아니라 일말의 희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뭐 하나 제대로 감각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암이면 암인 거겠지, 뭐. 그저 그런 느낌. 가고 싶지 않던 약속 하나 취소된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


그에 반해 부모님은 난리가 났다. 어머니는 이제 몸에 좋다는 온갖 즙들을 보내겠다고 성화였고, 아버지도 이것저것 병에 대해 찾아보셨다. 나는 아주 조금 짜증이 났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내 삶을 다시 통제하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사 계획도 멈췄다. 이직처에서 입사취소를 할 수도 있을 테고, 그보다 내가 진정 암이라면 치료를 받아야 할 터. 모아둔 돈은 홀랑 치료비에 써야 할 상황이었다. 본가에 내려가도 되나, 지금 집에서 통원해야 하나,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니 정말 현실로 다가왔다.


'조직검사상 만성 염증 소견 확인되었습니다. 6개월 뒤 재검하세요.'

 문자로 받은 결과. 신이 났다. 그래, 그럼 그렇지! 아프지 않지! 사무실에서 뛰쳐나와 복도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아니래! 암 아니래!


어머니는 오열했다. 잘됐다, 다행이다. 이 말만 아주 희미하게 알아들을 정도로 내뱉으며 꺼이꺼이 울었다. 아, 이게 어머니인데.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어미에게 자식은, 그저 건강하기만 하면 되는구나. 건강하다는 것만으로 큰 효도였음을. 진짜 암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짧은 몇 주 동안 어머니에게 엄청난 불효를 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제야 아버지는 그동안 어머니가 설거지하면서 싱크대를 붙잡고 무너져 내린 일, 티브이 보다 울고, 침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울고 했던 일화를 알려주셨다. 내가 생각 없이 탕후루 까먹고 있는 동안,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사이다를 홀짝이는 동안, 부모는 지옥에 살고 있었구나.


말 그대로 추가로 주어진 삶처럼 느껴졌다. 창 밖의 햇살은 유난히 빛나고, 내 몸은 어느 때보다 탄탄했고, 소중했다.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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