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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Mar 24. 2024

기다릴 시간

드라마 '닭강정' 속 노란색

우리 민아밖에 없는데.

난 그냥 우리 민아랑 살고 있었잖아.

우리 민아 아무 죄도 없는데, 너무 착한 아이인데.


- 넷플릭스 드라마 '닭강정' 중에서


어느 날 하루아침에 딸이 닭강정으로 변했다?!

엄청난 수치의 MBTI N의 소유자라도 감히 상상해 본 적 없었을 황당한 소재에 믿고 보는 배우 조합이 나를 사로잡았다. 코믹한 연기와 종잡을 수 없는 연출,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공책에 끄적인 듯한 대사들의 향연이었다. '너무 갔다'는 평도 있고, 실제로 화려한 출연진에 비해 바이럴도 크게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게는 이 드라마가 단순한 B급 코미디 시리즈로만은 남지 않을 듯하다. 


처음에 소개한 대사는 작중 '최선만', 즉 류승룡 배우의 대사다.

닭강정으로 변했다지만, 닭강정에게 생명력이 어디에 있나. 강정이 되기 전에는 닭이라는 생명이 있었을 터지만,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털이 뽑히고, 정육 되고, 튀겨진 강정에게는 그 어떤 생명력도 없다. 딸의 실체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상자 그림 안에 양이 들어있다고 믿는 일만큼 고도의 순수함이 있어야 '닭강정=딸' 공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 터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다 말할 순 없지만, 최선만은 딸 민아의 귀환을 기다려야 한다. 닭강정이 다시 딸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데에는 자그마치 50년이 걸린다. 이미 오십을 넘었던 최선만은 딸을 만나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최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산에서 생활한다. 거의 산신이 될 만큼 무병장수 하던 그는, 딸을 만날 수 있는 105세의 나이에 다다른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32013250005472?did=NA

한국일보 기사 중, 2006년 실종된 이윤희 씨 아버지 이동세 씨의 사진 


이번에는 현실의 아버지를 소개한다. 

87세의 아버지는 18년 전 실종된 딸을 아직도 기다린다. 하루아침에 딸이 사라졌다. 2006년 종강 모임을 마치고 귀가했다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흰머리가 성성한 아버지는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딸이 다녔던 대학교 캠퍼스에 가 노란색 카드를 돌린다. 딸을 찾기 위해서. 이 부성을 다룬 기사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딸을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


18년이나 기다렸는데, 이제는 아버지도 노인이다. 아버지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음에 아버지는 마음이 급해진다. 


배우 안재홍이 맡은 배역 '고백중'은 취업이 잘 되는 기계과에 진학하고, 채 숨기지 못할 반항심으로 분홍색 셔츠에 노란색 바지를 입는다. 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서 '옐로 팬츠'라는 활동명을 갖게 된다. 남몰래 흠모하던 상대가 닭강정이 되는 사건을 겪고,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던 음악을 계속해서 결국 전 세계적인 가수가 된다.


50년이 흐르고, 그의 공연을 기다리는 팬들은 온통 노란빛으로 거리를 채운다. 그 속에서 옐로 팬츠는 해사한 노란색 니트 카디건을 입고 있는 민아 씨를 본 듯하다. 한 걸음에 달려 가지만 민아 씨가 아니다. 50년 내내, 유명한 사람이 되었어도 백중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잘 살고 있던 평범한 이들에게 닥친 '말도 안 되는' 사건. 노란색. 기다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왜 하필 이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났을까. 수없이 외쳐봐도 원인을 알 순 없고, 해결 또한 되지 않는다. 


"내가 무너지면 내 딸이 실종된 것이 다 잊힐 것 같아"

실종자 아버지는 기다리기만 하지 않는다. 연로한 나이에도 지지 않고 나서서 딸의 실종을 세상에 알린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잊히는 것'일 터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의 딸의 존재가, 이 억울한 실종이 세상에서 영영 지워지니까. 스러져가는 나이에도 마지막까지 소리 내는 것이다.


그래서 기다리는 사람 옆에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소리 내는 것이다. 잊지 않는 것이다. 잊지 말자고 서로를 북돋우는 일이다. 날이 점점 따스해진다. 3월도 다 끝나가고 곧 4월이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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